[‘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6>공존 꿈꾸는 따뜻한 ‘대안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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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8일 03시 00분


노숙인 무담보 대출? 모두가 말렸다‘종잣돈 7년만에 10배’ 기적이 열렸다

《 “병원비 3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소?”(노숙인 최모 씨) “요즘 술 안 드시죠? 지난번에 잘 갚았으니 이번에도 믿고 빌려드릴게요.”(갈거리협동조합 관계자) 4일 강원 원주시 중앙동의 갈거리협동조합.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급식소 한쪽의 23m² 남짓한 조합 사무실에 노숙인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린다. 한 노숙인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예금을 하는가 하면 다른 노숙인은 대출 문의를 한다. 특별한 대출 기준은 없다. 신용등급이나 자산을 알아보는 시스템도 없다. ‘술 냄새가 나거나 생활태도가 불량한 사람에게는 빌려 주지 않는다’ 등 매우 주관적인 잣대가 있을 뿐이다. 협동조합의 장부에는 노숙인들이 맡긴 예금과 대출상환 명세가 빼곡히 적혀 있지만 ‘신용불량자’ 같은 빨간 딱지가 붙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갈거리협동조합의 신용대출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담보다. 》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적지 않은 서민이 제도권 금융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들이 갈 곳은 연 이자율 30%대의 대부업체, 그것도 안 되면 사채에 손을 대야 한다. 현 정부 들어 미소금융 등 서민전용 금융지원제도가 신설돼 사각지대에 놓인 일부 소외계층이 도움을 받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운용도 미숙하다는 평가가 많다. 공존 시장경제를 위해 금융의 공공적, 사회적 기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시점에서 금융사업으로 성공적일 뿐만 아니라 서민에게 재기의 밀알이 되는 ‘따뜻한 금융’의 현장을 소개한다.

○ 노숙인의 신뢰가 이룬 ‘작은 기적’


갈거리협동조합은 ‘겁 없는 조합’으로 불린다. 노숙인들이 조합원이자 대출 수혜자다. 이 협동조합의 원조 격인 복지시설 ‘갈거리사랑촌’의 곽병은 원장은 사랑촌을 찾는 사람들에게 저축을 권장하고 통장을 관리해줬다. 이후 뜻있는 독지가들과 함께 2000여만 원을 모아 2004년 9월 조합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다들 종잣돈이 곧 바닥날 것으로 봤다. “집도 없는 노숙인들이 출자하고, 서로 돈을 빌려준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고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노숙인에 대한 편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조합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기초수급대상자나 홀몸노인 등 소외계층 사람들이 조합에 참여했다. 2009년에는 조합 자산이 2억 원을 넘었다. 2004년 창립 당시 95명이던 조합원은 2011년 말 기준 283명으로 늘었고, 자산은 1억9775만 원으로 7년 만에 10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지난해 조합 설립 이후 처음 출자배당금도 지급했다. 신태숙 조합 사무국장은 “그동안 이자 수익이 쌓여 조합원들에게 나눠준 것”이라며 “조합원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합원들은 예금을 하는 동시에 담보 없이 연 4%로 200만 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종성 씨(59)는 4년 전 무료 급식소를 찾았다가 조합에 가입했다. 출자금은 몇만 원 수준이지만 조합에서 두 번 돈을 빌렸다. 김 씨는 “병원비로 50만 원 정도를 빌렸다가 갚고 얼마 전에는 연탄 들여놓느라 다시 빌렸다”며 “사채 말고는 아무도 우리한테 돈을 안 빌려줬는데, 이제 큰일을 당해도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갈거리협동조합에는 대출 기준도 딱히 없다. 평소 조합이나 무료 급식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생활 태도나 상담을 통해 자활 의지를 볼 뿐이다. 그럼에도 상환율은 95%에 이른다. 2004년 이후 총 115건, 1억5867만 원의 대출이 진행됐지만 돈을 떼인 건 10건이 채 안 된다. 최종적으로 부실이 난 것도 대출을 받고 며칠 뒤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 사무국장은 높은 상환율의 비결을 교육과 절박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조합원 교육을 통해 협동조합의 의미와 자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며 “엄격한 계약서보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유대감이 가장 큰 담보”라고 말했다.

○ 영세상인 도우려 쇼핑몰 막은 조합

갈거리협동조합의 원형은 원주 ‘밝음신협’이다. 밝음신협은 1980년대 원주소방서에 구급차를 기증해 국내 처음으로 응급환자 수송 수단을 만들었다. 1990년대 들어 사무실을 공짜로 빌려주며 ‘소비자 시민의 모임’이란 시민단체를 후원하기도 했다. 밝음신협 강호석 이사장은 “우리 경영 목표는 조합, 조합원,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윈-윈-윈’”이라고 말했다.

이 경영목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 10여 년 전, 한 대기업이 원주 재래시장 인근의 땅을 매입해 대형 쇼핑몰을 만들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실제 그런 움직임이 포착됐다. 당시 밝음신협 조합원이던 상인들은 쇼핑몰이 들어서면 장사를 접어야 할 상황이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밝음신협은 긴급 이사회를 열어 땅을 직접 매입하기로 했다. 조합원의 생계가 위협받으면 조합도 존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내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2000년 밝음신협은 외환위기 여파로 누적 손실이 23억 원에 이르면서 경영위기에 처했지만 조합원들의 도움으로 재기했다. 신협과 조합원이 어려울 때 서로를 도운 셈이다. 강 이사장은 “조합을 통해 도움을 받았거나 사회활동에 참여한 조합원들이 출자금을 늘리면서 우리를 지켜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2005년 말 흑자로 돌아섰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지금까지 순익을 유지하며 총자산을 늘려가고 있다. 밝음신협 관계자는 “신협이 조합원들에게 제공하는 복지와 교육이 지역경제 활성화의 밑거름이 되고, 이를 통해 자립한 조합원들이 신협을 키우는 원동력이 된다”며 “앞으로 조합원뿐 아니라 지역민까지 아우르는 참여형 복지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 대안금융의 새싹, 마이크로크레디트

대안금융의 또 다른 축은 빈곤층에 창업 지원금이나 긴급 생계자금을 무담보로 대출해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이다. 세계적으론 1976년 방글라데시에서 설립된 그라민은행이 대표적이며 국내에서는 2000년 신나는조합, 사회연대은행 등이 싹을 틔웠다.

이들은 미소중앙재단 또는 서울시와 같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부금을 받아 창업자금이나 긴급 생계자금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대출해준다. 대표적 복지사업자인 ‘신나는조합’은 창업자금을 연 6% 이자로 최대 5000만 원까지 빌려주는데 현재 상환율이 81.37%다. 한국경제가 이미 저성장 단계에 들어섰고 자영업이 포화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과다.

이성수 신나는조합 상임이사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이 돈을 퍼주는 시혜성 복지로 흘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싼 이자로 돈만 빌려줘 봤자 다시 실패할 소지가 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도 지속될 수 없다. 이 상임이사는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의 필수 조건으로 교육과 사후 컨설팅을 꼽았다. 일단 심사에서부터 신용등급이나 자산 같은 증빙자료보다 대출 신청자의 ‘됨됨이’와 실현 가능한 사업계획서를 더 중요하게 본다. 대출 전후에 이뤄지는 경영 컨설팅과 자원봉사자를 통한 사후 관리도 병행한다.

세계적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의 모범 대안은 아직 없다. 저개발 국가인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은 대출자 3, 4명이 연대보증을 통해 돈을 빌리지만 한국은 무담보 무보증 신용대출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현재 개인에게 최대 5000만 원까지 빌려주는 창업자금은 한국 상황에서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에 따라 유럽처럼 10인 이하 사업장에 좀 더 큰 액수를 대출해주거나 시장상인 같은 특정계층 위주로 대출하는 방식 등이 새로 검토된다. 이 상임이사는 “실제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컨설팅이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말했다.

원주=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대안금융 천국’ 프랑스, 민간기구가 은행 보증… 지역사회서 서민 대출 ▼


프랑스는 여러 형태의 서민금융사업을 운영하며 마이크로크레디트가 후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상생의 모델’임을 입증했다. 이 가운데 프랑스액티브는 저소득층을 위한 대표적 민간 보증기구다. 보증을 받기 힘든 저소득층이 보증부 신용대출을 통해 시중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 이 단체에서 보증서를 받은 사람은 프랑스 내 대부분의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은행이 보증서만 믿고 대출해주는 것은 프랑스액티브의 철저한 심사체계 덕분이다. 대출 신청자는 전문가로부터 15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고 사업계획 검토를 거친 후 은행원과 회계사로 구성된 위원회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프랑스이니셔티브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서민금융지원그룹이다. 지역 내 은행, 사업주, 비영리단체가 하나의 협의체를 만들어 지역주민에게 돈을 빌려준다. 만약 대출신청자가 100유로를 신청하면, 심사 후 이 단체에서 15유로를 이자 없이 빌려주고 나머지 85유로는 지역의 저축은행들이 일반대출 이자로 대출해준다. 사업주들은 기부금으로 운영비를 보태고 지역 내 경제 전문 자원봉사자들은 3년간 일대일 멘토링을 해준다. 멘토제도에 힘입어 대출자의 3년 후 생존율이 90%를 넘는다. 지난해 말 일주일간 프랑스의 서민금융 현장을 둘러보고 온 이성수 신나는조합 상임이사는 “선진국형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핵심은 사후 컨설팅과 같은 비금융서비스”라며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민의 자활에 공동책임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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