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스포츠카’ 하면 페라리 고유의 ‘스탈리온(준마)’ 로고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이 때문인지 페라리가 등장하는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알 파치노 주연의 1992년작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는 그 어느 영화보다도 페라리의 로고가 애잔하게 그려진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수류탄 사고로 두 눈을 잃은 퇴역 장교인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 분) 중령은 추수감사절 가족들을 여행 보내고 홀로 남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갈 차비를 벌어야 하는 가난한 고등학생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 분)가 그의 시중을 들기 위해 찾아옵니다.
늙은 퇴역 장교와 여드름이 난 고등학생의 첫 만남은 만만치 않습니다. 프랭크는 갑자기 “뉴욕에 가야겠다”며 비행기 일등석에 오릅니다. 여자 승무원에게 치근덕거리며 술을 들이켜던 프랭크는 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있지. 하나는 여자, 그 다음은 페라리 자동차야.”
5성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자포자기한 듯 보상금을 흥청망청 쓰는 프랭크. 과장된 몸짓과 말투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낯선 여인과 근사한 탱고를 춰 보기도 하지만 순간의 유희에 그칠 뿐이죠.
점차 무기력해져 가는 프랭크는 넌지시 죽음을 암시합니다. 찰리는 “드라이브나 하러 가자”며 기운을 북돋아주려 합니다. 삶을 포기한 듯 했던 프랭크는 돌연 들뜬 표정으로 말합니다. “어떤 차 말이냐?”
두 사람은 뉴욕의 페라리 전시장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17세 학생과 맹인에게 시승차를 선뜻 내어 줄 리가 없습니다. 프랭크는 찰리의 아버지를 자처하며 딜러에게 2000달러를 쥐여주고 차 키를 받아냅니다. 1989년형 몬디알 T 카브리올레(사진). 당시 판매 가격이 11만 달러(약 1억3000만 원)에 달했던 최고출력 300마력의 지붕개폐형 스포츠카입니다.
어렵게 탄 페라리이지만, 조수석에 앉은 프랭크의 표정은 도통 밝아지지가 않습니다. 결국 직접 운전대를 잡고 나서야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어집니다. 흥에 겨워 뉴욕 시내를 달리며 환호성을 지르는 프랭크. 이 위험천만한 질주는 흥겨운 탱고 음악과 어우러져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호텔로 돌아온 일행. 프랭크는 정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겨눕니다. 찰리는 총을 내려놓으라고 설득하지만 속수무책입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하나만 대 보라”고 절규하는 프랭크에게 찰리는 울먹이며 말합니다. “당신만큼 멋지게 탱고를 추고 페라리를 잘 모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요!” 결국 둘은 최고의 친구가 됩니다.
앞을 볼 수 없는 프랭크에게 페라리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를 헤치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꿈이 아니었을까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같은 마음으로 꿈의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에 사로잡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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