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자들의 화두 “돈 안 잃는게 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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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9일 03시 00분


#1 수백억 원대의 돈을 굴리는 자산가 A 씨는 이달 초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거래 은행의 담당 프라이빗뱅커(PB)에겐 “시장 상황도 안 좋고 별로 나아질 조짐도 없다. 골프 치고 바람도 쐴 겸 나갔다가 2월에 오겠다”고 했다. 출국 전 A 씨는 그동안 투자했던 금융상품은 손절매를 통해 거의 다 정리했고 일부만 수시입출금이 되는 단기상품에 넣어 놨다.

#2 개인사업을 하는 40대 후반의 B 씨는 최근 만기 3개월짜리 주가연계증권(ELS)에 50억 원을 투자했다. 수익률은 연 4%가 채 되지 않지만 원금이 보장된다. 그는 원래 이 돈을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넣어놨었지만 3개월 만에 투자 대상을 바꿨다. 요즘 B 씨처럼 거액을 다양한 초단기 상품에 돌려가며 투자하는 자산가가 많다. 》
정기예금이나 주식(펀드), 부동산 등 전통적인 투자대상을 기피하는 단기 부동자금이 불어나고 있다. 특히 부자들 사이에선 1년 이상 뚝심 있게 한곳에 묻어두는 장기투자는 거의 실종된 상태다. 시중은행의 PB들은 “최대한 현 상황을 유지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 올해 부자들의 자산관리 키워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부자들의 이러한 투자행태는 요즘의 특수한 대내외 경제상황이 고루 반영된 결과다. 국내에선 고물가와 저금리로 은행에 돈을 맡겨도 돈을 잃는 ‘마이너스 금리’가 지속되고 있다. 부동산시장은 올해도 부정적 전망 일색이다. 주식에 눈을 돌리자니 유럽 재정위기가 지속되고 신흥국도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특히 당장 올봄에 유럽 주요국의 국채만기가 집중돼 있어 투자자들은 숨죽이며 ‘폭풍’을 기다리는 심정이다.

투자자들이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눈치를 보다 보니 투자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메뚜기 자금’은 지난해 말에 크게 늘었다. 18일 동아일보가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금과 요구불예금, 수시입출금식 저축성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양도성예금증서(CD), 자산관리계좌(CMA), 환매조건부채권(RP), 6개월 미만 정기예금, 증권사 예탁금 등 국내 단기성 자금의 규모는 지난해 11월 말 현재 654조 원에 이르렀다. 같은 해 8월 말(643조 원)보다 11조 원 늘어났다.

시장의 장·단기 금리 차가 줄어든 것도 단기성 자금이 늘어난 원인 중 하나다. 요즘 하루만 맡겨도 이자를 주는 단기상품의 금리가 연 3%가량인데 1년을 넣어둔다고 해도 금리는 연 4%를 넘기 힘들기 때문이다. 1%포인트를 더 얻기 위해 돈을 묶어놓느니 차라리 언제나 뺄 수 있도록 대기자금으로 놔두는 것을 선택하는 것.

특히 부자들은 ‘돈을 잃지 않는 게 돈 버는 것’이라는 신조로 투자하고 있다. 배종우 하나은행 청담동 PB팀장은 “자산가들은 한 번에 투자하는 금액이 크다 보니 높은 수익률보다는 원금 보존 욕구가 매우 강하다”고 전했다. 신동일 국민은행 압구정PB센터 부센터장은 “간혹 주식에 직접 투자해볼까 고민하는 부자도 있지만 결국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자산가들의 투자행태에 맞추어 금융시장에선 단기 ELS나 특정금전신탁(MMT)처럼 갈 곳 없는 투자금을 쓸어가는 상품이 많아졌다. 만기 3개월짜리 초단기 예금, MMF의 인기도 높다. 대부분 원금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품들. 강우신 기업은행 강남PB센터장은 “지금은 안팎으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부자들은 올해 한 번쯤은 돈을 벌 기회가 올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한다”며 “이 때문에 초단기 상품이 뜨고 있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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