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의 대표 양모 씨(58)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136m² 아파트를 전세금 3억6000만 원에 살고 있다. 노원구 상계동에 96m²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큰딸의 학군과 통학을 고려해 전세로 이사 온 뒤 7년째 성동구 일대를 옮겨 다니고 있다. 최근 1년새 주변 전세금이 5000만 원 넘게 뛰었지만 크게 부담을 느끼진 않는다. 양 씨는 “상계동 전세금을 1000만 원 정도 올리고, 나머지는 여유자금으로 충당했다”며 “아직 고등학생인 둘째 때문에 당분간은 전세살이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양 씨처럼 자기 집이 있으면서도 전월세를 전전하는 ‘부자세입자’들이 전세난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평균 1억3000만 원가량의 금융자산을 갖춘 고소득자들로 교육 및 주거 여건이 좋은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 등에 밀집해 살고 있었다. 부자세입자들의 전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쏟아내는 다양한 전월세 안정대책이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주택산업연구원 장성수, 황은정 연구원의 ‘자가 보유 전월세 거주가구 주거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 세입자들의 거주지역은 강남 3구와 양천, 강동, 종로구 등 주거환경과 교육여건이 좋아 값이 비싸고 아파트 비중이 높은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특히 강남 3구는 이들 비중이 전체 세입자의 27%나 됐다.
이들은 무주택 임차인들과 소득 수준이나 금융자산 규모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평균 금융자산은 약 1억3148만 원, 월평균 소득은 405만 원이었다. 월평균 소득이 1000만 원을 웃도는 가구도 4%가 넘었다. 반면 무주택 임차인들의 금융자산은 4752만 원, 월평균 소득은 224만 원에 불과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한 이유도 달랐다. 무주택 세입자들은 소득 감소(11.8%), 집세 부담(11.2%) 등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부자세입자들은 자녀교육(12.2%), 교통(14.2%) 등이 상위를 차지했다.
이런 부자세입자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로, 2005년 전체 임대가구의 10.2%에서 2010년 15.2%로 비중이 높아졌다. 이들이 주택 구매력을 갖췄음에도 전월세를 고집하는 것은 집값이 하락기여서 투자가치가 떨어지는 데다 보유세 부담 등 제반 비용을 감안할 때 전월세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의 75%가량이 전세금 마련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절반에 가까운 45%가 2년 이내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또 한 번 전세금이 뛸 개연성이 크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했다.
장 선임연구원은 “지금처럼 전체 전세거주가구를 저소득층으로 분류하는 정책을 고집해서는 구매력이 있으면서도 전세를 택해 전세 수요와 전세금을 높이는 부자세입자들을 매매시장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장 연구원은 “민간 건설업체들은 부자세입자의 수요가 많은 지역에 주택공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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