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다.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세칭 명문고, 명문대의 ‘엘리트 코스’를 밟거나 고시를 통해 인생 역전을 이룬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서울대에 합격한 서울의 일반고 출신 중에서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3구’ 출신이 42.5%에 이른다. 2009년에 신규 임용된 판사의 37%는 강남3구와 특목고 출신이다.
‘영어유치원-사립초-국제중-특목고’로 이어지는 새로운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선 매년 수업료와 특별활동비에만 1000만 원 정도를 쏟아 부어야 한다. 영어유치원 1년과 초중고교 12년간 사교육비를 빼도 1억3000만 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높아진 교육비용 부담으로 양질의 교육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교육의 신분 상승 기능도 점차 쇠퇴하고 있다. 노력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
가난할수록 꿈도 가난해지는 세태는 통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동아일보가 현대경제연구원과 함께 통계청 사회조사와 가계동향을 분석한 결과 소득이 낮을수록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의 신분 상승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소득이 100만 원 미만인 가구 가운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25.0%로, 월 소득 600만 원 이상(50.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 소득 100만 원∼200만 원 미만 가구는 23.5%로 100만 원 미만 가구보다 신분 상승 가능성을 더 부정적으로 내다봤고, 200만 원∼300만 원 미만 가구 역시 26.5%만 신분 상승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다.
특히 양극화로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끊겼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중산층일수록 자녀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상승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응답이 많았다. 실제로 월 소득 400만 원∼500만 원 미만 가구는 자녀들의 신분 상승 가능성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이 46.3%로 가장 높았다. 이어 300만 원∼400만 원 미만 가구(45.8%)와 200만 원∼300만 원 미만 가구(45.4%)가 뒤를 이었다.
반면 월 소득 600만 원 이상 고소득층은 52.5%가 자녀 세대의 신분 상승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고소득층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 세대보다 사회적으로 더 높은 신분이 되거나,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반면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들이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을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것보다 더 낮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양극화의 심화로 중산층에 머무는 것도 어려워지면서 상류층으로의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며 “상류층과 중산층 간의 교육비 격차가 늘면서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는 것도 원인”이라고 말했다.
○ ‘젊을수록 신분 상승에 회의적’
젊은 세대일수록 신분 상승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경향도 나타났다. 30대 가운데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25.8%로 모든 연령대 중에 가장 낮았고 40대는 26.7%로 뒤를 이었다.
20대는 31.1%가 신분 상승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봐 30, 40대보다는 높았지만 60대(31.9%)보다는 낮았다.
특히 2040세대는 자녀들의 신분 상승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30대는 자녀들의 신분 상승 가능성이 낮다는 응답이 47.8%로 절반에 육박했고 40대 46.9%, 20대 45% 순이었다. 50대와 60대가 각각 44.2%, 34.3%였던 것을 감안하면 젊을수록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사회·경제적 신분이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속성장 시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50, 60대에 비해 2040세대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만성화된 취업난과 양극화, 교육격차를 체감하면서 신분 이동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40대 초반부터 20대까지는 외환위기와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취업난과 양극화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며 “이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50, 60대와 달리 계층 이동에 대한 희망을 잃은 세대”라고 말했다.
○ 교육의 신분상승 사다리 기능 복원하려면
전문가들은 신분상승을 위한 사다리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계층 간 교육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를 위해 외국어고·국제고 등 특목고의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 대학의 기회균등 선발제에서 저소득층 비율에 대한 기준을 도입하고, 정부의 학비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특목고는 정원의 20%가량을 저소득층과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 자녀 등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선발하도록 하고 있으나 저소득층 자녀 비율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 이에 따라 실제 저소득층 자녀는 대부분 정원의 5%가 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 2007년부터 도입된 대학의 기회균등선발제도 마찬가지다. 정원의 11%를 농어촌 학생이나 전문계고 출신 학생으로 선발하도록 하고 있지만, 지난해 기회균등선발제를 통해 신입생을 뽑은 16개 서울 주요 대학 중 10곳은 저소득층 자녀 비율이 2%에도 미치지 못했다.
고소득층에 대한 교육비 소득공제를 축소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에 대한 교육비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지난해 고등학교 교육비와 대학생 교육비에 대한 소득공제 한도는 1인당 각각 300만 원, 900만 원이다. 소득세를 많이 내는 고소득층일수록 소득공제의 폭도 커지는 데 반해 소득세가 면제되면서 정부의 교육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은 교육비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대소득세율 35%를 적용받는 고소득자는 연간 등록금 800만 원을 내더라도 280만 원이 감면되지만 소득세 면제대상자는 이런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이에 따라 교육비 소득공제 혜택을 줄여 마련한 재원으로 저소득층에 방과후학교 등을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바우처 지원’을 확대하자는 의견도 교육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육비에 대한 소득공제는 고소득층에 유리한 구조”라며 “학생 수가 줄어드는 만큼 정부의 교육 재원을 저소득층 자녀에 대한 교육지원을 확대하는 데 더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 美 저소득층에 희망 주는 ‘차터스쿨’ 빈민층 자녀 추첨해 학비 전액 지원 일반 공립학교보다 대학 진학률 높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지난해 6월 워싱턴의 한 차터스쿨 놀이터 공사 현장에 참석해 공사를 돕고 있다. 동아일보DB“많은 교육 혁신이 차터스쿨(Charter School)에서 일어나고 있다.”
차터스쿨의 확대는 교육경쟁력 끌어올리기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내세운 저소득층과 소수인종을 위한 공교육 개혁의 핵심 정책이다. 차터스쿨은 교육 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고 주로 학부모와 교사, 지역단체가 공동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미국의 자율형 공립학교다.
차터스쿨은 교육과정이나 수업 운영에 완전한 자율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특성과 요구에 따라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대학 입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에서부터 과학, 기술, 예술 분야 차터스쿨, 영재교육 전문 차터스쿨 등 다양한 형태의 차터스쿨이 운영되고 있다. 그 대신에 5년마다 실적을 평가해 당초 목표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 폐교되는 등 철저히 실적 중심으로 운영된다.
2009년 현재 미국 전역에 5053개에 이르는 차터스쿨은 대부분 빈민층이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도심에 있어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들의 대학 진학률은 일반 공립학교보다 높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가 ‘기적을 이룬 학교’ 10곳 중 1위로 꼽힌 차터스쿨인 ‘프루스 스쿨 UCSD’는 학생 전원이 저소득층이지만 대학 진학률은 99%에 이른다. 저소득층과 소수인종 출신 학생들의 신분 상승을 돕는 사다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차터스쿨은 입학시험이 없는 추첨제인 데다 학비 역시 국가가 전액 지원하고 있다. 공교육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된 자율형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막대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관계자는 “차터스쿨은 소외계층과 소외지역 학교의 자율성을 높여 공교육을 개혁했다는 점에서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기존 특성화고교뿐만 아니라 자립형 학교를 늘리면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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