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폐해 수술과 재벌 배척 달라”… 경제 망칠 ‘포퓰리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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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4일 03시 00분


■ 권혁세 금감원장 이례적 ‘재벌 옹호론’ 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23일 “재벌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등 일부 과오가 있었지만 투자를 늘려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정치권의 무차별적인 ‘재벌 때리기’에 우려를 표시했다. 동아일보DB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23일 “재벌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등 일부 과오가 있었지만 투자를 늘려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정치권의 무차별적인 ‘재벌 때리기’에 우려를 표시했다. 동아일보DB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23일 이례적으로 재벌 옹호론을 편 것은 국민 여론에 편승한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재벌 때리기’가 재벌 해체로 이어질 정도로 도가 지나쳐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한 한국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다. 재벌의 폐해를 바로잡는 것과 재벌을 배척하는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취지도 담고 있다.

이는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한국 대기업이 도요타나 애플 같은 경쟁기업이 아닌 정치권이라는 ‘의외의 적’을 만났다”고 꼬집거나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 정치권이 대기업의 빵집 경영을 비판하며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 ‘아픈 구석’도 지적한 옹호론

금감원은 올해 대기업이 금융계열사를 과도하게 지원하거나 대주주의 부당 내부거래 문제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고 이를 중점 검사테마로 정했다. 금감원은 사전 분석 차원에서 각종 규제완화 조치가 대기업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들여다봤다. 분석 결과, 대기업이 경제에 기여한 순기능이 역기능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계열사 부당지원 등의 검사는 강도 높게 실시해 재벌의 역기능을 적극 해소할 계획이다.

권 원장은 분석 대상인 36개 대기업그룹이 글로벌 금융위기 때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투자 확대로 이들의 평균 총자산은 2007년 말 37조 원에서 2010년 말 55조 원으로 급증했다. 대기업의 투자는 주로 설비 쪽에 집중돼 고용 확대 효과는 별로 없다는 인식이 많았지만, 2007년 말 이후 3년 동안 조사대상 대기업의 고용증가율은 20%에 육박했다. 같은 기간 전체 고용증가율이 2%에도 못 미친 점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한 성과다.


이번 분석에서 권 원장은 정치권이 비판하는 재벌의 ‘아픈 구석’도 구체적으로 짚어냈다. 재벌 총수일가의 실질적인 지분은 지속적으로 하락한 반면 임원과 계열사 지분을 모두 합친 지분은 꾸준히 늘어 ‘경영권 왜곡현상’이 심해진 점도 그중 하나다. 총수 일가가 기업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막강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상황을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 ‘가계부채 뇌관’ 건드릴 수도

정치권의 무분별한 ‘재벌 때리기’로 대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 그 불똥은 가계부채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분야로 튈 수 있다. 실제 금감원은 ‘수출 경쟁력 저하→내수 경기 둔화→자영업 및 부동산 경기 위축’의 경로를 거쳐 가계부채가 급속도로 부실화하는 암울한 시나리오도 상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금감원은 최근 총 900조 원을 넘어선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우려되는 계층으로 음식업, 도·소매업 등에 종사하는 자영업자와 집을 겨우 샀지만 대출이자 갚느라 생활고를 겪는 ‘하우스푸어(House Poor)’를 들고 있다. 자영업자가 국내 전체 고용 인력의 30%에 육박할 정도인 상황에서 경기 둔화는 이들에게 ‘장사를 그만두라’는 신호와 마찬가지다. 특히 자영업자들은 가계대출뿐만 아니라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중소기업대출도 많이 받은 상태여서 이들이 도산하면 부실이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또 하우스푸어의 유일한 탈출구는 지금의 집을 팔거나 전세를 주고 작은 집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빚을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의 근간인 대기업이 투자를 축소하면서 촉발되는 경기 침체로 주택 거래가 크게 줄어드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금감원은 우려했다.

○ 출총제 재도입땐 부작용


권 원장은 정책의 효과를 따지지 않고 대기업을 코너로 모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성격의 정책을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재벌 자체를 부정하는 ‘소 잡는 칼(규제 전면 도입)’ 대신 썩은 가지를 쳐낼 ‘작은 가위(맞춤형 정책)’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우선 중소기업 분야에 대기업이 무분별하게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소기업 적합업종의 영역을 확대하는 한편 중소기업이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도록 ‘중소기업 전용 회사채 발행시장’을 육성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재벌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 독단적 경영을 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소액주주라도 전체 주주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대표소송의 요건을 완화하는 방안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대표소송을 내려면 전체 지분의 0.01%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이에 반해 미국과 일본에서는 1주만 보유해도 대표소송을 낼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한다.

하지만 권 원장은 정치권이 제기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에는 반대했다. 출총제가 경제력 집중현상을 막아 위기 때 경제가 한꺼번에 부실화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지만 이는 대기업의 투자가 줄면 중소기업 투자도 위축돼 국가경쟁력이 추락하는 부작용을 간과한 것이라고 권 원장은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방안을 강구해야지 대기업의 투자를 규제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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