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어디로]리먼 쇼크에도 끄떡없던 ‘소비 버팀목’ 中上層 지갑 닫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8일 03시 00분


대기업 부장인 배모 씨(39·여)는 10년간 써오던 고급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의 클렌징 제품을 최근 국산 중저가 제품으로 바꿨다. 국산 화장품의 질이 크게 좋아진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3분의 1 수준인 가격에 끌렸기 때문이다. 매달 구두를 2, 3켤레씩 사던 ‘취미’도 얼마 전부터는 자제하고 있다. 구형 3G 모델 휴대전화의 약정기간이 끝나가면서 통신사에서 “최신 LTE 제품으로 바꾸라”는 마케팅 전화가 자주 걸려오지만 못들은 척하고 있다.

배 부장은 유통업계 등에서 흔히 말하는 전형적 ‘중상층(upper middle class)’이다. 대출 없이 서울 시내에 30평형대 아파트를 샀고 역시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월급까지 합치면 연소득이 ‘억대’이다. 최근 들어 자신과 남편의 월급이 특별히 줄어든 것도 아닌데 배 부장이 씀씀이를 크게 줄인 이유는 뭘까.

그는 “적금 대신 펀드에 목돈을 넣었는데 증시가 좋지 않아 단숨에 500만 원을 날렸다”며 “당장 가계에 타격이 온 것은 아니지만 유럽발 경제위기가 더 확산될 거라는 전망이 많아 가급적 씀씀이를 줄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상층이 지갑을 닫고 있다. 이들의 소비가 위축되면서 한없이 호황을 누릴 것만 같았던 명품과 고급 해외 화장품 등의 시장에도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 사상 최장 정기세일 준비하는 백화점

유통업계에서는 한 백화점에서만 연간 200만∼800만 원을 쓰고, 명품의 대중적인 모델과 수입 고급화장품, 2000cc급 이상의 수입자동차를 살 수 있는 계층을 중상층으로 본다. 중상층은 2008년 ‘리먼 쇼크’ 등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도 소비 규모를 줄이지 않았던 핵심 소비계층이다. 각종 해외 명품이나 수백∼수천만 원대의 아웃도어용품 시장이 급신장을 해온 것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상층이 지갑을 닫으면서 가장 비상이 걸린 곳은 백화점이다. 재고 처리 목적으로 최근 50∼80%대의 할인율로 대대적 세일을 벌였던 주요 백화점들은 29일부터 시작되는 7월 정기세일 기간 역시 사상 최장 수준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통상 여름 정기세일은 17일간 진행됐지만 내부적으로 30일간의 세일 방침을 확정한 업체도 있다.

고급 수입 화장품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이 감소했다. A백화점 본점의 경우 주요 수입 화장품은 ‘리먼 쇼크’가 발생한 2008년과 후폭풍이 이어졌던 2009년에도 각각 27.2%와 29.5%의 매출 증가율을 보일 정도로 소비 기반이 탄탄했다. 그런데 올 1∼5월에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이 11.0%나 줄었다는 것. 수입 화장품만큼이나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온 명품 잡화군도 매출이 줄어들고 있다.

○ “다른 계층의 소비심리에도 악영향”


중상층이 지갑을 닫는 데는 유럽발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부동산시장 상황이 크게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집을 갖고 있는 가구는 집값이 떨어져서, 전세를 사는 가구는 전세금이 단기간에 급등한 것이 소비심리를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한 백화점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7∼12월)부터 본격화된 백화점 매출 하락 추이가 전세금 상승 추이와 맞물려 진행됐다”며 “전세금을 올려주느라 수천만∼수억 원의 현금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큰 타격을 입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민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득이 줄지 않은 중상층마저 ‘비축’과 ‘대비’를 키워드로 삼고 지갑을 닫고 있는 것이 현재의 경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중상층의 소비심리가 위축되자 관련업계는 최상층, 이른바 VVIP를 겨냥한 마케팅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상위 20%에 해당하는 고객이 백화점 전체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매출을 낸다는 80 대 20의 ‘파레토 법칙’이 최근 ‘90 대 10’으로 바뀌고 있다”면서 “이 10%에 대한 차별화된 서비스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입 명품 업체의 한 관계자도 “상당수 명품업체가 대중적 모델 대신, 최상류층을 겨냥한 고급 모델을 강조하면서 ‘명품시장 저성장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중상층이 소비의 유행 창출자 역할을 하면서 나머지 계층의 소비심리를 견인해 왔기 때문에 중상층이 지갑을 닫으면 다른 계층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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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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