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외교통상부 간부들 사이에서는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라는 책이 화제였다.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외교 거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미국 쇠퇴론’과 ‘중국 부상론’을 분석하고 이에 따라 전 세계의 정치·외교적 지형이 어떻게 변할지 전망한 글이다.
이 중 외교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부분은 한국의 미래를 언급한 책의 후반부. “미국의 쇠퇴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공약이 약해질 경우 한국은 중국의 지역 주도권을 인정하고 중국에 안보를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중국에 안보를 의존한다’는 시나리오는 사실상 한국이 중국과 동맹 수준의 안보협력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60년 가까이 유지해온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1954년 11월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초로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안보상황을 관리해온 한국으로서는 ‘중국과의 군사동맹’은 기존의 사고를 180도 전환하는 획기적인 발상인 셈이다.
○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는다?
중국을 전공한 학자들은 미중 사이에서 외교적 대응을 고민해온 한국이 가야 할 방향으로 ‘연미화중(聯美和中)’을 거론해 왔다. 미국과 강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는 화합한다는 의미다. ‘화중’은 구체적으로 대북정책 같은 민감한 현안에서의 한중 간 차이점을 줄여가면서 상호 이해관계가 맞는 이슈들을 중심으로 협력을 확대해 나간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연중(聯中)’의 개념까지 제시하고 있다. 중국과도 미국 못지않게 강도 높은 외교안보 분야의 협력관계를 맺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김흥규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가장 확실한 ‘연중’이겠지만 그 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과 신뢰를 쌓아 안보협력 단계를 심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정부는 최근 중국과의 군사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들은 5월 일본과의 군사정보 공유를 위한 군사비밀보호협정(GSOMIA) 체결을 추진하면서 “중국과도 이 협정을 맺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방부도 “중국과는 재난구호물자 등을 지원하는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을 먼저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군사협력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고 이마저 당장 추진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돌발적인 안보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기본적인 협력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군사협정 체결은 난망이기 때문이다.
○ “잘못하다간 ‘박쥐’ 신세”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군사동맹 수준의 ‘연중’은 실현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북한이라는 변수 탓에 한중 간 군사협력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는 물론이고 지난해 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불거진 외교안보 이슈들에서 줄곧 북한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혈맹관계임을 내세워 오히려 한미관계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더욱이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아시아에서 패권 경쟁을 본격화하면서 한국의 ‘양다리 외교’는 설자리가 없고 결국 한쪽의 선택을 강요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동북아 전략연구기관 니어(NEAR)재단의 정덕구 이사장은 “한국이 ‘이중 플레이’를 하려고 하다간 박쥐같은 신세가 돼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년간 매년 두 자릿수의 국방비 증가율을 유지해 왔다. 올해 국방예산도 지난해보다 11.2% 증가한 1060억 달러(약 124조 원)로 책정하고 각종 첨단무기 확충에 나선 상태다. 이에 미국은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으로 대응하면서 갈등을 낳고 있다. 이처럼 대결이 격화되는 구도에선 중립 노선은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 주력해온 이명박 정부 내에서도 “역시 미국밖엔 없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래서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려면 역설적으로 한미동맹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가 미국을 등에 업고 있으니 중국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미국과의 동맹이 깨지는 순간 중국은 과거 역사가 그랬듯 한국을 속국처럼 대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장기적으로 ‘연미연중’은 가능”
그럼에도 한국이 중국과 외교안보 분야에서 더욱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 중국의 협조 없이는 북한의 핵실험 같은 도발행위를 막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은 절실하다.
스인훙(時殷弘) 중국 런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지리적 위치, 북한문제의 중요성, 북-중 양국 관계의 현 상태, 한중 간 교류 확대에 비춰볼 때 한국은 한미군사동맹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중국과 정치·안보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양국 간 대화 창구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요한 안보 현안이 터질 때마다 중국과의 소통 부재 논란이 이는 상황에서 고위급 핫라인을 구축해 긴급 현안에 대한 긴밀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아울러 중국과의 경제분야 협력을 외교안보 분야의 협력으로 이어가기 위해 올해 5월 협상이 개시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중요한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한국이 장기적으로 ‘연미연중’ 수준의 외교안보 협력을 이뤄낼 수 있는 방안으로 중국을 동북아시아 다자안보체제로 끌어들일 것을 제안한다.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를 모두 포함하는 다자안보체제를 만들면 한미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안보협력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세계 최대의 지역안보협력기구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람베르토 차니에르 사무총장은 “각국이 의지만 있다면 북핵 6자회담을 OSCE 같은 다자협력체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이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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