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에 창립 50돌이 줄을 잇고 있다. 대신, 동양, 현대증권 등 상당수 대형 증권사가 50년 전인 1962년 설립됐다. 그해 증권사 설립이 많았던 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증권거래법이 제정됐기 때문이다.
당시 연간 거래대금은 983억 원이었고 상장 기업은 12개에 불과했다. 요즘 상장사는 1800개에 이르고 거래대금은 하루 5조 원을 오르내린다. 그런데도 증권업계는 우울하다. 창립 50주년 기념사들에서 우려를 넘어 절박감도 엿보였다.
한 증권사 대표는 증권업계의 현실을 ‘폭포를 향해 달려가는 배’에 비유했다. 이대로 가다간 추락한다는 뜻이다. 증권사 실적은 바닥을 모른 채 가라앉고 있다. 2분기 흑자를 낼 증권사는 한 곳도 없다는 분석도 나왔다. “거래가 안 되니 손을 쓸 방법이 없다”는 푸념만 들린다.
6조 원을 오르내리던 하루 거래금액은 4월부터 4조 원대에 머물고 있다. 거래가 줄면 수수료 수입이 줄어든다. 펀드나 랩 등 금융상품도 안 팔리기는 마찬가지다. 사상 최고점이 2,230 남짓인 코스피는 올 들어 한때 2,000을 웃돌았고 지금도 1,900을 바라보고 있다. 증권업계 위기가 시황 탓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각 증권사가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회사별 철학도 없고 고객 이익보다 증권사 실적에만 목을 맸다는 것이다. 각 증권사는 유행 따라 백화점식으로 상품을 팔아왔다. 펀드가 유행하면 모든 증권사가 펀드를 팔고, 랩이 뜨면 너도나도 최고의 상품인 양 선전했다. 증권사들이 전문성 없이 수수료 챙기기에 바쁘다는 걸 고객들도 눈치를 챘다.
요즘 잘 팔리는 상품은 주가연계증권(ELS)이다. 1분기 발행 잔액이 사상 최고인 120조 원이다. ‘위험이 적고 수익률은 높고 수수료는 낮다’며 증권사들은 앞다퉈 추천한다. ELS 수수료는 약 1%인데 조기상환이 많아 연 2%에 가까운 수수료를 증권사가 가져간다. 반면 수수료가 0.3∼0.5% 남짓이고 길게 보면 수익률도 좋은 상장지수펀드(ETF) 등 인덱스펀드를 먼저 추천하는 증권사 직원은 드물다. 돈(수수료)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올해 사임한 한 증권사 전직 사장은 “한국에서 증권사는 고객의 장기 이익을 추구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현직 사장 A 씨는 “패스트푸드처럼 패스트 투자에 초점을 맞추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국내 증권사 대표들의 평균 임기는 2년 남짓이다. 단기 실적에 신경쓰다 보니 ‘빨리 싸게 먹을 수 있지만 몸에 좋지 않은’ 패스트푸드 같은 상품을 팔아왔다는 얘기다. 자산운용사도 마찬가지다. 한 개 펀드를 5년 이상 운용한 펀드매니저를 손에 꼽을 정도다. 투자자들도 증권업계를 믿지 못하고 장세가 조금만 나빠지면 금융상품을 팔아치운다.
중견 증권사의 인수가격은 비공식적으로 수천억 원을 호가한다. 적자 기업의 가격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증시 호황이 오면 손쉽게 이익이 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한 전문가는 “제조나 건설로 돈을 벌면 자식을 금융회사 오너로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안일한 기대와 겉멋이 맞물린 걸 보면 저축은행과도 닮았다.
금융의 본질은 신뢰다. 오랜 기간 고객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믿음을 줘야 신뢰도 쌓인다. 지금 증권업계가 위기라면 그 본질은 신뢰의 위기다. 우리는 언제쯤 고객에게 진정으로 신뢰받는 증권사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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