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낮 1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선 3명은 모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흰색 반팔 드레스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넥타이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구두는 모두 검은색. 직장은 제각각이었지만 마치 같은 유니폼을 입은 듯했다. 이들을 포함해 점심식사를 하러 나온 남자 20여 명도 비슷한 차림으로 횡단보도 앞에 도열해 있었다. 2명은 셔츠가 하늘색, 4명은 바지가 남색이었다. 나머지는 몸에 붙는 정도가 약간 다를 뿐 ‘흰색 반팔 상의+검은색 하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천편일률적인 ‘쿨비즈’ 바람
서울시가 최근 에너지 절감을 위해 반바지 착용을 권장하는 등 ‘쿨비즈(Cool-Biz)’ 운동을 시작했다. 일부 기업은 몇 년 전부터 복장 자유화를 도입했다. 하지만 직장 남성의 복장에는 별 변화가 없다는 게 의류업계의 분석이다. 삼성패션연구소가 지난해 제일모직 계열사가 판매한 남성 드레스셔츠의 색상을 분석한 결과 흰색과 파란색이 각각 73.7%와 13.4%를 차지했고 회색 등 기타 색상은 12.9%에 불과했다.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 ‘갤럭시’ 매장에서 근무하는 박재상 매니저는 “요즘 쿨비즈란 말이 유행하지만 실제 고객의 소비 패턴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봄과 가을에는 셔츠 위에 다양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어 약간의 차별화가 가능하지만 셔츠와 바지만 입는 여름이 되면 출근 패션의 획일성이 더욱 부각된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처럼 청바지에 터틀넥 셔츠를 입거나 말단 직원들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하는 모습은 아직 먼 나라 얘기인 것이다.
남성의 옷차림이 정형화돼 있다 보니 의류업체들은 흰색이나 푸른색 셔츠와 검정색 남색 바지 등 ‘기본형 상품’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국내 남성 고객은 여전히 무난하고 남들이 많이 입는 옷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상품 기획을 할 때 기본 스타일의 물량을 70% 이상 준비하고 나머지는 유행을 고려해 색상이나 체크무늬로 차별화한다”고 설명했다.
○ ‘교복패션’에 집착하는 이유는?
직장 남성들의 천편일률적인 ‘드레스코드’가 깨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나 혼자 튀면 손해 본다’는 내면화된 집단주의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패션에 무감각했던 기성세대가 만든 무형의 복장 기준에서 일부 직원이 이탈할 경우 다수가 불편해하고 그런 시선이 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한림대 사회학과 유팔무 교수는 “다수 안에 묻혀있을 때 안전함을 느끼는 게 한국 조직문화”라며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도 어렵게 취업하기 때문에 직장 내 복장문화를 ‘2차 사회화’로 여기고 순응한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D건설에 입사한 윤모 씨는 “회사에서 흰색이나 파란색이 아닌 다른 셔츠를 입으면 조직 융화에 악영향을 주는 느낌이 든다”며 “상사가 지나가면서 ‘요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넌지시 얘기하면 왠지 불성실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자신이 화이트칼라 종사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드러내려는 생각도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이명신 연구원은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매치하는 게 사무직 남성의 세련된 옷차림이라는 인식이 오래 지속돼 왔다”며 “그렇게 입어야 괜찮은 직업군에 속한다는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옷 색깔이 화려하면 전문성이 떨어지고 반바지 등 편한 복장은 업무 긴장도를 떨어뜨린다는 선입견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남들이 많이 입는 옷은 대충 입어도 중간은 간다는 안도감도 남성 직장인의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여성에 비해 쇼핑에 관심이 적은 대부분의 남성은 몇 벌만 가지고도 한 계절을 보낼 수 있는 옷을 선호한다. 자주 입어도 스스로 질리지 않고 ‘옷을 못 입는다’는 남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주변 동료들과 잘 동화될 수 있는 옷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특정 집단이 얼마나 유연하고 개방적인지를 보여주는 복장문화가 획일화되면 사고가 경직되고 집단의 틀에 갇히기 쉽다”며 “혁신을 중요시하는 기업이라면 직원들에게 다양한 옷차림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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