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막 세운 뒤 스미토모 철강이란 큰 일본 회사에 납품하려고 찾아갔는데 일본인 경영진들이 한국인이라며 비하하는 투로 말하곤 했어요. 오기가 생겨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약하겠다고 맘먹었죠. 스미토모는 5년 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을 뒤로한 채 우리와 계약을 맺었어요. 기술력을 인정한 겁니다. 그 후에는 저를 ‘닥터 홍’이라고 불러요. 깔보는 듯한 태도도 싹 바뀌었어요. 우리 제품으로 스미토모는 떼돈을 벌었으니까요.”
홍명기 회장(78)은 백발이 성성한 노(老)신사였지만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를 발산했다. 미국시장 점유율 1위에 세계 ‘빅5’에 드는 특수페인트 제조업체 듀라코트를 경영하고 있는 홍 회장을 16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재미 한인동포 사회에 지금까지 700만 달러(약 80억 원)를 기부하기도 한 그는 재외동포 재단 업무로 한국을 방문했다.
○ 아내의 응원에 창업 모험
듀라코트는 우리나라에선 생소하지만 미국 업계에서는 ‘세라나멜’이란 제품으로 유명하다. 건축물을 지으려면 철근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코팅이 필요한데 여기에 꼭 들어가는 것이 세라나멜이다.
홍 회장이 회사를 차린 것은 51세 때인 1985년. 대개 모험을 하기보다는 안전을 택할 나이였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현지 페인트회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27년간 일했다. 많은 제품을 개발해 큰돈을 벌어줬지만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됐다. 함께 입사한 동료가 부사장이 되자 좌절했다.
“마이너리티(소수민족)라고 이렇게 대할 수 있나”라며 울분만 삼키고 있는데 간호사인 부인이 “망해도 내가 밥 먹여 살릴 테니 걱정 말고 사업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 2만 달러로 차린 회사가 지금의 듀라코트다.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 본사 외에 앨라배마 주 헌츠빌에 지사를 둔 이 회사는 지난해 2억 달러(약 23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 한인 동포사회의 든든한 재정 후원자
홍 회장은 로스앤젤레스 동포사회를 지원하는 든든한 재정 후원자이기도 하다. 로스앤젤레스 한국학원이 폐교 위기에 처했을 때인 2000년에는 기금모금위원장을 맡았고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던 2003년에는 기념사업회 전국총회 명예회장을 맡아 행사 추진을 도왔다. 2001년에는 차세대 지도자 육성, 젊은 기업가 지원, 장학 및 사회복지사업 등을 돕는 ‘밝은미래재단’을 세우면서 1000만 달러(약 114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고, 지금까지 700만 달러를 내놓았다.
강석희 캘리포니아 주 어바인 시장의 후원회장을 맡는 등 재미 한인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도 힘써오고 있다. 그는 “재미동포들이 미국 정계에 많이 진출하면 돈독한 한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된다”며 “현재 미 의회에 일본계나 중국계 의원은 다수 있지만 한국인은 한 명도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를 부탁했다. “금방 백만장자가 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지름길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기본을 닦아야 합니다. 꾸준함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한국의 젊은이들은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