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30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전문위원 명단이 공개되자 공정거래위원회는 크게 술렁였다. 2명의 국장급 이상 간부를 전문위원으로 파견하겠다고 추천했지만 인수위가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러다 정말 공정위가 폐지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나왔다.
4년 반이 흐른 지금 현 정부 내에서 공정위가 차지하는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물가관리, 동반성장, 대기업집단 일감 몰아주기 제재, 가계부채 문제까지 정부의 주된 경제정책의 최전선에 모두 공정위가 서 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경제민주화’ 법안들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어 차기 정부에서 공정위의 권한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경제민주화의 핵심 내용이 공정위를 통해 ‘재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대기업들 사이에서는 “공정위가 국세청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전방위로 권한 확대하는 공정위
공정위의 역할 확대는 수치로 확인된다. 공정위 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 수는 156건으로 전년 대비 136.4% 늘었다.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사건 수는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였던 2007년 326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뒤 2008년 141건, 2009년 78건, 2010년 66건 등으로 해마다 감소하다 다시 급증한 것이다.
공정위 접수 전체 사건 중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의 비율도 지난해 4.2%로 2010년(1.8%)의 2.3배였다. 공정위의 처벌 수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불공정거래에 대한 과징금 부과 사건은 77건으로 전년도보다 327.8% 급증했고 담합 역시 34건으로 30.8% 늘었다.
이런 결과는 공정위가 ‘물가당국’을 자처하면서 가격급등 품목을 대상으로 조사를 확대한 데 따른 것이다. 공정위는 지난해 초부터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자 이례적으로 라면의 성분까지 분석하며 표시광고법 위반으로 제재했다. 유가 상승, 통신비 부담이 논란이 되자 5개 정유사에 주유소 거리제한 담합으로 4326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최근에는 일감 몰아주기 등 대기업집단(그룹)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다. 지난해 그룹 계열사 간 내부거래 공시 위반 등 경제력 집중 억제 분야의 과징금 부과 액수는 590억 원으로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였던 2002년 890억 원 이후 가장 많았다.
공정위가 동반성장 차원에서 업계와의 ‘합의’나 ‘자율’의 형식을 빌려 기업을 압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공정위는 지난해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 대형유통업체에 판매수수료를 인하하도록 한 데 이어 올 초 경쟁 입찰을 확대하도록 10대 그룹의 자율선언을 유도했다. 최근에는 베이커리, 피자, 치킨 프랜차이즈를 대상으로 일정 반경 안에 신규 가맹점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모범거래기준을 도입했다.
○ 재벌규제 부활되면 권력집중 심화
공정위의 권한 강화는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폐지하고 각종 진입규제와 지방자치단체의 불합리한 조례를 정비하도록 하는 등 규제완화 업무를 강화했던 이명박 정부 초기 방향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차기 정부에서는 공정위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게 공정위 안팎의 공통된 예상이다. 순환출자 금지, 출총제 부활, 지주회사 규제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 정치권 경제민주화 방안 대부분은 공정위의 업무다. 특히 출총제와 순환출자 금지 등 그룹 지배구조와 관련한 규제가 강화되면 노무현 정부 말기에 출총제 완화로 잃었던 대기업에 대한 영향력이 대폭 강화된다. 공정위는 이미 지난해 대기업집단 내부거래 실태, 이달 초 대기업집단 지분도를 공개한 데 이어 하반기에도 채무보증 현황 등 민감한 기업정보를 계속 공개하며 대기업 압박에 나설 방침이다.
공정위는 이런 권한 확대의 원인을 달라진 경제환경의 탓으로 설명한다. 공정위 당국자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산업의 독과점이 늘었고, 서민생활 안정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라 공정위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과 경제학자들은 공정위가 영역 확장에 집중하면서 시장 경쟁을 촉진하는 본래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동반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정위가 시장 자율을 침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기업활동을 독려해야 하는 시점에서 정치권의 포퓰리즘으로 공정위의 재벌정책을 부활시키는 것은 경제에 큰 악영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정위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조사는 공정위의 위상에 중대한 갈림길이 될 수 있다. CD금리 담합이 사실로 판명되면 공정위의 위상이 더 강화되겠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 등이 공정위의 조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정위가 금융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한 조사를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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