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멘붕, 종류와 대처법
경기 도중 극도로 흥분해 Choke에 빠진 선수, 아무말도 못 들어
Yips는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결정적 실수를 반복하는 현상
“뭬야? 오늘 하루만 멘붕이 3번이나?” 그래서 술 한잔 사달라고 후배에게 전화가 온다. 후배의 ‘멘붕 3종 세트’는 다음과 같다.
①아침=숙취 해소를 위해 계란까지 풀어 끓였으나, 이불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쏟아버린 라면 ②오전=분명히 어제 전화로 샘플 요청을 했는데 금시초문이라고 우기는 거래처 직원 ③오후=자기가 얘기하는데 딴짓했다고 회의실로 끌고 들어가 1시간 동안 훈계하는 부장. 당신도 이런 멘붕에 공감하는가?
멘붕. 요즘 참 많이 쓰는 말이다. 인터넷에서 최고 인기 유행어로 선정되기도 했단다. 멘붕은 ‘멘털(mental) 붕괴’의 약자다.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인터넷에서는 마음의 상처나 당혹감 등 비교적 경미한 것부터 문자 그대로 정신 줄을 놓을 정도의 사건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멘붕이란 말은 디시인사이드의 스타크래프트 갤러리(게시판)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 상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선수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멘털이 붕괴됐다”란 표현을 썼단다. 이 말이 유행하다 멘붕이란 줄임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 성인비디오의 ‘멘부레(メンブレ·mental break)’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으나 많은 호응을 얻고 있진 못하다.
이번 주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심리 전문가 두 분을 모시고 멘붕을 탐구해봤다. 장미란, 진종오 등 국가대표 선수들의 멘털 트레이닝을 맡아 온 김병현 박사(한국체육과학연구원)와 정신과 전문의 최주연 박사(강남연정신과의원 원장)다. 멘붕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이여, 귀를 쫑긋 세우고 한번 들어보지 않겠는가?
○ 벌건 대낮에 눈 뜨고 가위 눌려
우리말 표현 중에 ‘열을 받아 눈앞이 깜깜해진다’란 게 있다. 김병현 박사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멘붕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열을 받는다는 것은 흥분 수준이 극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것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극도로 흥분한 사람은 시야가 좁아지며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인간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범위와 정보 처리의 용량은 흥분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흥분 수준이 높아질수록 집중의 범위(폭)가 점점 좁아진다. ▼ 고수와 하수 차이는 평정심… 욕심 버리고 ‘마음의 근육’ 키워야 ▼
이럴 때 운동선수는 게임을 풀어가는 데 꼭 필요한 정보를 놓치게 돼 지고 만다. 연인의 혼수상태를 죽음으로 오인해 목숨을 끊은 로미오도 그런 케이스다.
멘붕이 오면 우리 몸에도 변화가 생긴다. 신경계가 흥분하며, 맥박과 호흡이 빨라지는 등 순환계에 변화가 온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상태가 호랑이 앞에 서 있을 때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스트레스가 너무 과도해지면 정신은 물론이고 육체 건강까지 무너질 수 있다. 스트레스 관련 호르몬은 중요한 기억을 담당하는 두뇌 세포 사이의 연결을 끊으며, 면역 체계를 고장 낸다. 언어와 연산 능력에도 장애가 생긴다. 실제로 멘붕 상태에 빠졌을 때는 몸이 부르르 떨리고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멘붕이 심해지면 ‘초크(choke)’라 불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초크는 운동 경기 중에 선수가 극도로 흥분 또는 긴장한 나머지 멍해지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눈을 뜬 채로 가위에 눌리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초크에 빠진 선수는 감독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부정적 심리상태가 모든 외부 정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입스(yips)라는 것도 있다. 마음속의 트라우마 때문에 특정 상황에서 몸이 굳어지는 현상이다. 올해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의 김종현(소총 3자세 50m)에게 은메달을 헌납한 미국의 매슈 에먼스가 대표적 피해자다. 이 선수는 9발까지 김종현을 앞서고 있었지만, 마지막 10번째 발에서 7.6점을 쏴 김종현(마지막 발 10.4점)에게 은메달을 내줬다. 에먼스는 사실 예전부터 마지막 발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다. 아테네 올림픽(2004년)에서는 1위를 달리다 마지막 발을 옆 선수 표적에 쏘아(0점) 8위로 추락했다. 베이징 올림픽(2008년) 때는 7점만 쏴도 우승이 가능한 상황에서 4.4점을 쏴 4위에 머물렀다.
때론 기분이 좋을 때도 멘붕 현상이 생긴다. 호르몬에 흠뻑 취해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기분이 나쁠 때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9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예선 1차전)를 떠올려보자.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선제골을 넣었던 하석주 선수(현재 아주대 감독)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 선수에게 무리한 백태클을 해 골을 넣은 지 3분 만에 퇴장 당했다. 하 감독은 아직도 “흥분은 금물”이라고 강조한다.
멘붕이 극도로 심해지면 자기 파괴 등 일정 선을 넘는 사태가 생긴다. 옛날 미국 전쟁영화를 보면 동료의 전사 등으로 흥분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 총을 난사하다 적병에게 사살당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일상생활에서는 소위 ‘눈이 돌아가’ 난동을 피우거나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행동은 당신의 안녕에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직장인 등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또라이’로 찍히며, 당신의 혈기 방장한 ‘활약상’이 두고두고 조직 안에서 회자된다.
그러므로 회사에서 울고불고 하거나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행위는 절대로 하지 말자. 아무리 김태희, 장동건이라도 용서받기 힘들다.
○ 발가락에 의식을 집중하라
그렇다면 이렇게 위험한 멘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O₂가 국내외 서적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한 결과 몇 가지 공통되는 팁(tip)을 찾을 수 있었다. 그중 실생활에서 이용하기 쉬운 것들만을 정리해 봤다.
①성경, 불경을 필사하라=너무 간단한가? 우습게 들린다면 일단 해 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 보라.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필사) 뒤에는 심오한 심리학적 배경이 있다. 바로 인간의 인지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두뇌가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유한하다. 따라서 다른 행위(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 등)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면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안정감이 생길 수 있다.
최주연 박사는 이에 대해 “명상에서 말하는 ‘생각 버리기’란 사실 ‘다른 것으로 생각 채우기’와 개념이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성경, 불경 이외에 잡지나 신문 기사를 베껴 써도 되며, 여러 다양한 행동으로 머릿속의 근심걱정을 몰아내도 된다. 컨설팅회사 부사장 최모 씨(44·여)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버스에서 일찍 내려 동네 개천 옆 산책로를 무작정 걷는다. 외국에선 당혹스럽거나 화가 날 때 손가락이나 발가락에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을 권장한다.
②심호흡을 하거나 자신의 숨소리를 들어보라=최 박사는 “흥분 상황에서 인간은 대부분의 신체 반응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호흡은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심호흡은 신경을 안정시키고 뇌에 산소를 공급해 마음이 편안해지게 한다. 외국의 체육 전문가들은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는 방법을 많이 권한다. 또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해 보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나아질 수 있다. ‘생각 버리기 연습’으로 유명한 일본의 코이케 스님은 자신의 책에서 ‘화가 나거나 흥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얕아진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편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편해진다’고 썼다. 몸의 근육을 이완하는 것도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된다. 허리와 어깨를 펴고 스트레칭을 해 보라.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뭉쳐 있는지 느껴 봐도 괜찮다.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 몸은 긴장을 풀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③물리적,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져보라=두산그룹은 올해 5월 중역들에게 모래시계를 나눠줬다. 모래가 흘러내리는 3분 동안 자신의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숙고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하면 직관이나 감정에 치우쳐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빈도가 줄어든다고 한다. 김병현 박사는 선수들에게 실수를 하고 난 뒤에는 작전타임을 요청해 90초 동안 안정을 취해 보라고 말한다. 90초는 흥분과 관련된 호르몬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원리를 활용해보면 좋다. 멘붕 상태가 왔을 때는 일단 일손을 놓고 쉬거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보라.
④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라=실수가 또 다른 실수를 낳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김 박사가 “보통 아이가 아니다”라고 극찬한 진종오 선수가 바로 그렇다. 그는 총을 잘못 쏜 뒤에도 그냥 ‘내가 한 발을 잘못 쐈구나’라고 바로 인정해 버린다. 그렇게 해야 흥분한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실수를 만회할 방법을 찾느라 마음이 흔들리면 더 큰 실수가 생긴다.
이 밖에 생각의 초점을 미래로 옮겨보는 방법도 있다. 배우 박중훈 씨는 한 인터뷰에서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것인가’라고 자문해 본다”고 했다. 그는 만약 ‘No’라는 결론이 내려지면 깨끗이 걱정을 접는다고 말했다.
○ 약팀이 우르르 무너지는 이유
여기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멘붕의 뿌리까지 탐구해 보면 어떨까. 멘붕의 근저를 살펴보면 정말 중요하고 근본적인 개념 두 가지가 나온다. 바로 불안감과 평정심이다. 불안은 멘붕의 원인이며, 평정심은 우리가 멘붕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마음 상태다.
전문가들은 불안은 욕심에서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김병현 박사는 “불안이란 목표와 자신의 능력을 비교하며 ‘할 수 있을까’라고 조바심을 내는 데서 온다”고 설명했다. 즉 욕심에서 불안이, 불안에서 멘붕 현상이 생긴다는 말이다.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욕심을 버리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패러독스(역설) 하나가 생겨난다. 욕심을 버리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김 박사는 “인생이나 스포츠나 모두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선수는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하지만, 경기 중에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목표란 ‘깃발’은 명확하게 꽂아두되 욕심이 시야를 가리지 않게 해야 하지요.” 국가대표 선수들은 “마음을 비우면 경기가 잘된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한다.
욕심을 버리면 경기가 잘 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욕심을 내려놓으면 경기의 결과보다는 진행 과정에 더 집중할 수 있으며, 불안에 따른 부정적 반응(흥분으로 시야가 좁아지는 것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신궁으로 불렸던 양궁 스타 김수녕 씨는 “경기 때 절대로 점수판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또 불안을 해소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나는 흥분하고, 서두르고, 불안해하고 있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이런 질문을 하고, 그 원인을 알아차리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동으로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육체와 정신의 신비다.
마음을 관조하고 내면을 다스리는 데는 독서가 큰 도움이 된다. 진종오 선수는 올림픽 직전 매스컴과 국민의 관심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진 상태였다. 그는 책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을 다스렸다. 김 박사는 “책을 읽을 때는 남에게 설득 당한다는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내면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감이 불안 해소 및 평정심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불안과 자신감이 같은 인지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최주연 박사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회나 개인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자신감을 바탕으로 충분히 그것을 수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 사회, 개인은 위기가 오면 우르르 무너지고 만다.
박지성이 말한 ‘위닝 멘털리티(winning mentality·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위닝 멘털리티를 가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 2점 정도의 실점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퀸스파크 레인저스(QPR) 같은 팀은 1골만 잃으면 우르르 무너지곤 한다. 고수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하수는 떠벌리는 것으로 자신감의 부족을 메우려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이다.
인생과 경기에서의 승패는 모두 멘털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훈련하기에 따라서 몸뿐만 아니라 생각과 마음에도 근육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일반 선수들보다 멘털에서 한 수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마음의 근육을 키워 인생의 승자가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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