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평균 물가상승률이 약 4%이고, 정보기술(IT) 기기 제조업의 평균임금이 평균 5% 상승한 점을 미뤄 볼 때 납품단가를 20% 이상 낮추라고 한 요구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18일 오후 한국거래소 국제회의장. 법복을 입은 재판부 앞에서 김경태 변호사가 프린터 제조 중소기업인 ‘선명산업’을 대리해 대기업인 ‘스마트전자’에 2587억 원을 지급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기업소송연구회가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마련한 모의재판. 스마트전자나 선명산업은 시나리오 속 가상의 기업들이었지만 김 변호사나 스마트전자 측 신보경 변호사는 진짜 법조인으로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 “소송 남발하고 브로커도 판칠 것”
대기업의 불공정거래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지난해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도입됐다. 이 법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돌려 얻은 이익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에는 더 강도 높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법안도 계류돼 있다. 이 법안들은 기술 탈취뿐 아니라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에 대해서도 대기업이 최대 10배까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개정 하도급법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은 아직 실제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경련은 현재 발의된 다수 법안대로 모든 하도급거래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면 중소기업이 소송을 남발하고, ‘소송 브로커’가 판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모의재판 상황도 다분히 스마트전자 처지에서는 억울하도록 꾸며졌다. 스마트전자는 선명산업으로부터 휴대용 저장장치(USB)의 자료를 읽어 인쇄물을 출력하는 프린터를 납품받던 중 다른 중소기업이 더 싼값에 같은 제품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하자 선명산업에 단가 인하를 요구한다. 스마트전자가 협력업체를 바꾸자 선명산업은 소송을 내고 자신들의 기술을 스마트전자가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과연 스마트전자는 횡포를 부린 것일까.
○ 국회는 “대기업이 자초한 일”
변론에 나선 신 변호사는 “프린터의 단가는 매년 가격이 꾸준히 떨어지고 있으며 지난해 계약 당시 다른 종류의 프린터 가격도 15% 하락했다”고 반박했다. USB 자료를 인쇄하는 프린터 기술도 대단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선명산업이 신기술을 개발한 건 맞지만 이후 기술혁신을 게을리 해 경쟁력을 잃었다는 얘기였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히 맞섰지만 전경련의 의도는 확실히 전달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확대되면 국내 대기업은 시장 환경이 변해도 일단 정해진 납품단가를 바꿀 수 없게 된다’는 것, 이에 따라 오히려 대기업들이 외국 중소기업을 선호하는 등의 부작용이 빚어질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15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나 부당 단가 인하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 도입하겠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협력업체를 일회성 거래 상대방으로만 보면 대기업의 생존도 위협을 받을 것”이라며 “단가 인하나 발주 취소 등 불공정행위는 대기업이 의식을 바꾸기만 하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모의재판에 참석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새누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도 축사에서 “급진적인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대기업이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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