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64)은 요즘 사무실 주변에서 식사할 때면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약속장소로 걸어간다. 이달 초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에서 현재의 서울 중구 수표동 시그니쳐타워로 옮긴 뒤부터다. 박 회장은 “가까운 거리를 굳이 자동차로 다닐 필요도 없을뿐더러 직원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사옥을 이전한 뒤 ‘회장님 실종사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격식을 따지지 않는 박 회장이 비서실에 알리지 않고 혼자 여러 층을 다니며 직원들을 만나는 바람에 “회장님이 사라졌다”고 한때 소동이 난 것이다.
24일 박 회장과의 인터뷰도 주로 청계천 산책로를 걸으며 이뤄졌다. 최근 여러 가지 어려운 일 탓에 마음이 무거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박 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뒤 2년 연속 역대 최고의 실적을 달성한 데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의 분리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호석화는 2010년 매출 4조9600억 원에 영업이익 5700억 원을 올리며 역대 최고 실적을 거두었다. 지난해에도 매출 6조4000억 원에 영업이익 8400억 원으로 최고 실적을 새로 썼다. 이 정도면 박 회장의 독자적인 경영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석유화학 제품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금호석화 측은 “박 회장의 과감한 투자가 세계 시장 호황과 맞물리면서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여수 고무 제2공장은 2008년 착공했지만 그룹의 유동성 문제로 몇 차례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박 회장은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며 공장 건설을 밀어붙였다. 결국 합성고무의 일종인 부타디엔고무를 생산하는 이 공장은 2011년 준공하자마자 주문이 밀려들면서 공장가동률이 바로 100%로 올랐다. 지난해 연간 4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된 셈이다.
이런 실적 덕분에 한때 500%에 이르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202%로 낮아졌다. 올 5월에는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정보평가, 나이스 등의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 ‘A―’를 받았다. 박 회장이 경영에 복귀했을 당시의 등급(BBB―)보다 3계단 상승한 것이다. 올해 말 기준 부채비율이 200%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확실해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충족했다. 10월 중순 채권단회의를 거쳐 연말이면 3년간의 자율협약(워크아웃 이전 단계, 우량기업의 도산을 막기 위한 채권단 지원의 한 종류)이 종료될 예정이다. 박 회장은 “채권단 관리로 투자는 물론이고 인사권 행사조차 제한을 받았지만 자율협약이 종료되면 본격적으로 홀로서기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현재 석유화학 시장의 전망이 밝지 않지만 2020년까지 일등 제품 20개를 만들어 매출 20조 원을 올리겠다는 ‘비전2020’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9년 6월 금호아시아나그룹과의 계열분리를 선언한 뒤 박 회장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를 두고 형인 박삼구 회장과 의견차를 보이다가 결국 해임되는 일까지 생겼다. 박 회장은 “당시 인수합병은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무리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내 경영철학은 한 가지 분야에서 1등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그룹과의 연결고리는 아시아나항공 지분(12.6%)이다. 박 회장은 “현재 주가가 너무 떨어져 있어 적당히 가격이 오르면 지분을 팔 것”이라고 밝혔다. 채권단이 담보에서 풀어준 대우건설 주식(3.52%)도 “향후 가격이 오르면 주저 없이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건설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대우건설을 비롯한 건설업계 빅5는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며 “주가가 회복되면 매입 당시의 가격(주당 2만6000원)의 최소 절반은 건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금호석화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당시 그룹의 요청으로 주식을 매입했다. 25일 종가 기준 대우건설의 주가는 주당 1만400원으로 매입 당시의 40% 수준이다.
박 회장은 올 연말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색깔을 지우는 데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그는 “최근 금호산업에서 ‘금호’ 브랜드를 함께 사용하는 우리 측에 로열티를 요구해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사명 변경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 공헌에 앞장서던 ‘금호’의 유전자는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음악 영재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분야를 지원했다면 금호석화는 틀을 바꿔 보다 폭 넓은 예술 분야를 지원할 계획이다. 박 회장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음악교육과 미술 등으로 지원 범위를 바꿔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금호석화의 신(新)사옥을 지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박 회장은 “당분간 벌어들이는 돈은 모두 투자해야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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