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바닥에서 배웠다. 고통 없는 대가는 없다.’ 동아일보가 만난 두 사람의 성공 스토리가 묘하게 겹쳤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 비결도 비슷했다. 박기출 PG인베스트먼트홀딩스 회장과 노정호 신세계인터내셔날 상무는 세칭 명문대 출신이 아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동안 스스로 ‘잘나간다’고 생각했지만 회사는 1998년 외환위기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들도 회사를 나오게 됐다. 박 회장은 “나는 한국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마이너리티였다”고 말했다. 노 상무는 “내 가게가 다른 점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걸려 있는 제품뿐이었다”고 회고했다. 》
“다른 회사 주재원 중에 간혹 저를 찾아와 성공 노하우를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보낼 정도면 이미 실력과 경험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모자란 게 있어요.”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부품업체 PG인베스트먼트홀딩스를 운영하는 박기출 회장(56)은 ‘샐러리맨의 꿈’ 같은 존재다. 40대에 대기업에서 나와 자기 회사를 차렸고, 그 회사가 10년여 만에 직원 1500명, 연간 매출액은 약 100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그는 “사업은 두뇌나 경험이 아니라 바닥을 찍고 살아남으려는 끈기와 근성으로 이루는 것”이라며 “건설회사 소장으로 일하며 머리를 잘 숙이지 않던 나도 내 껍데기를 여러 차례 깨고 쓰디쓴 고통을 견디며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첫 번째 껍데기’는 1998년 몸담고 있던 쌍용건설 싱가포르 사무소를 떠나 세계적인 건축 외장재 업체인 퍼마스틸리사로 소속을 옮길 때 깨졌다. 박 회장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강하던 시절이었고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한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에 쌍용건설이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이직을 결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화가 다른 외국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배우는 것도 많았다. 2000년에 퍼마스틸리사를 떠나 싱가포르의 지인이 인수한 현지 컴퓨터 부품업체에 투자금을 내고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에는 껍데기가 여러 겹 한꺼번에 벗겨졌다.
분업화가 잘된 대기업의 간부가 아니라 한 회사의 경영을 온전히 책임지는 사장으로 일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게다가 그 부품업체는 예상보다 부실이 심각했다. 1년도 채 못 돼 회사는 부도를 냈다. 그는 “매일 채권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영어와 프레젠테이션 실력이 굉장히 늘었다”며 웃었다.
40대 중반에 이국땅에서 빈털터리가 됐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국에서 스프링을 구해 납품할 수 있겠느냐’는 말레이시아 자동차조립업체 구매담당자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남동공단과 시화공단, 울산, 대불공단을 무작정 찾아 샘플을 구하러 다녔다.
“제가 갑(甲)일 때에는 사람들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하지 않았어요. 을(乙)도 아니고 병(丙)으로 떨어져 보니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더군요.”
처음에는 스프링, 그 다음에는 자동차시트, 다음에는 전자부품으로 차차 사업 영역을 넓히면서 공장을 만들고 계열사를 세웠다. 지금은 싱가포르 한인회장과 최대 민간 한인 네트워크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만큼 의미 있는 봉사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의사나 판검사가 된다고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리지 않았나”라며 “한국 젊은이들에게 틀을 깨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학연도 지연도 인맥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바로 그렇게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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