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돈농가가 돼지를 내다팔 때 기준이 되는 가격인 지육(枝肉) 도매가는 19일 현재 1kg에 2907원이다. 구제역 파동으로 돼지고기 가격이 급등했던 지난해 5월의 6898원과 비교하면 절반도 채 안 되는 42.1% 수준이다. 올해 1월 가격 4658원과 비교해도 37.6%나 떨어져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처럼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한 것은 돼지 사육 마릿수가 적정 수준인 800만∼850만 마리를 크게 웃도는 990만1000마리(9월 말 현재)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0년 말∼지난해 초 전국을 휩쓴 구제역 파동 때 애써 키운 돼지를 땅에 묻었던 농민들이 1년여 만에 정상을 되찾으며 본격적으로 물량을 쏟아내면서 생긴 일이다. 당시 운 좋게 구제역을 피한 농가들도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삼겹살 값이 크게 오르자 사육 규모를 늘려 ‘돼지 파동’에 일조했다.
이번 돼지파동은 예견된 일이다. 대한양돈협회는 3월 말 정부가 삼겹살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수입관세를 물리지 않는 할당관세 적용을 연장하겠다고 발표하자 “돼지 출하를 중단하겠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는 당시 “생산비가 올랐다고 하지만 여전히 돼지고기 가격은 kg당 생산비(4034원)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반박했다.
6개월이 흐르고 양돈협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현재 시세로 양돈농가는 110kg짜리 돼지 한 마리를 팔 때마다 12만4000원가량 손해를 본다.
16일 만난 경기 안성시 일죽면 양돈농민 김상덕 씨(53)는 “소비가 늘어 돼지고기 가격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해 1월 이 지역을 덮친 구제역 파동 때 키우던 돼지 3000마리를 모두 땅에 묻었다. 지난해 4월부터 어미돼지를 다시 사와 키우기 시작해 이달 들어 정상적으로 출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돈사(豚舍) 시설자금, 각종 대출금, 직원 3명의 인건비 등으로 2억 원 넘는 돈을 들였지만 수입은 거의 없었다.
돼지 3000마리를 키우려면 사료비와 각종 경비를 합쳐 한 달에 8000만 원가량 든다. 하지만 돼지고기 가격 폭락으로 김 씨가 최근 벌어들이는 돈은 월 6000만 원 수준이다. 그는 “농장 문을 닫을 수 없으니 그냥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료 가격이 꾸준히 오르고 있는 점도 양돈 농가에게는 큰 부담이다. 연초 1kg에 480원 선이던 사료 가격은 현재 530원 수준으로 올랐다. 앞으로 떨어질 기미도 없다. ▼ “돼지 1마리 팔면 12만4000원 손해” ▼
농협 관계자는 “국제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어 90% 이상을 수입 곡물에 의존하는 사료 가격은 내년 초까지 추가로 10% 이상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생산비가 오르더라도 돼지고기 가격이 생산원가 이상 수준으로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올해 말 국내 돼지 사육 마릿수는 960만 마리가량이 될 것으로 보여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올해 들어 양돈농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입한 삼겹살 10만 t 가운데 미처 팔리지 않은 상당한 물량이 각 유통업체와 식품업체의 창고에 쌓여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돼지고기 가격 상승 시점은 멀기만 하다.
가격이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일부 농가에서는 비용을 줄이려 고육책을 쓰고 있다. 육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축 50일 전부터
먹이는 비육후기 사료(저열량 사료)조차 먹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육후기 사료 대신 고열량 사료를 먹이면 육질은 떨어지지만
출하시기를 최대 한 달 이상 앞당겨 사육 원가를 5%가량 줄일 수 있다.
다이어트와 건강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면서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도 양돈업계를 힘들게 하고 있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돼지고기 매출은 전년
대비 4.5% 감소한 데 이어 올 1∼9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4.2% 줄었다. 돼지고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7월 이후에도 이
같은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마트는 아예 기름기가 적은 돼지고기를 직접 생산하기로
했다. 전국 농장 10여 곳과 계약을 하고 보리와 소맥을 섞은 저열량 사료를 먹여 키운, 지방 양이 적은 돼지를 시세보다
5∼10% 비싼 값에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문주석 이마트 축산담당 바이어는 “지방 비율이 낮은 기능성 프리미엄 돼지고기 매출이
전체 돼지고기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년 전 15% 수준에서 최근에는 50%까지 높아졌다”고 말했다.
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는 돼지고기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한돈 다이어트’ 보급에 힘쓰고 있다. 지방 비율이 낮은 돼지고기 부위를
이용한 레시피를 개발해 다이어트 식단으로 보급하고 각종 헬스대회 후원, 다이어트 체험단 모집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또 전국
500곳의 초중학교에 국내산 돼지고기 100%로 만든 소시지를 급식용으로 보급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돼지고기 가격 안정을 위해 8일부터 도매시장 지육 가격이 kg당 3500원 이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농협을 통해
매일 2000마리를 사들이고 있다. 또 가격이 kg당 3300원 이하일 때 뒷다리살을 매입해 6개월간 비축하는 육가공업체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단기간에 공급을 줄이거나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낼 수 없는
축산물의 특성상 중장기적 가격 전망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지적했다. 김민경 건국대 교수(축산경영유통경제학)는
“현재 농촌경제연구원이 담당하고 있는 수요공급 전망 예측을 한층 정교하게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양돈농가가 제때 사육 마릿수를
조절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육 선물(先物)시장 활성화도 돼지고기 가격 안정에 중요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08년 7월 개설된 돈육 선물시장은 2월 16일 이후 현재까지 단 한 건의 거래도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김 교수는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가 세계 옥수수 가격의 예측 기준이 되고 있는 것처럼 돈육 선물시장이
살아나면 양돈업계가 선물거래 동향을 보고 자율적으로 사육 마릿수 조절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가도 꿈쩍하지 않는 외식업계도 문제다. 정선현 양돈협회 전무는 “현재 돼지고기 시세에서는 고깃집의 삼겹살 1인분 가격은 1만 원
이하여야 정상”이라며 “요즘처럼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도 식당 메뉴판이 그대로라면 소비자가 굳이 지갑을 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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