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창조하지 못하는 ‘추격자 전략(follower strategy)’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4년 전 삼성전자가 ‘아이폰’을 앞세운 애플에 스마트폰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자 전문가들은 이런 진단을 내놓았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실적으로 이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기라는 올해에도 분기마다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다. 26일에는 매출액 52조1800억 원, 영업이익 8조1200억 원이라는 3분기(7∼9월) 실적을 발표했다.
이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2008년 연매출 100조 원을 넘어선 지 4년 만인 올해 ‘200조 원 클럽’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매년 평균 14%씩 꾸준히 성장한 결과다. 세계적으로 200조 원 고지를 밟은 기업은 지금까지 13곳뿐이다. 에너지기업을 뺀 순수 제조업체는 도요타자동차와 폴크스바겐밖에 없었다.
경이로운 성장을 거듭하는 삼성전자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지 2회에 걸쳐 분석한다.
○ 최대 실적에도 ‘새벽 출근’
사상 최고의 3분기 실적 발표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는 오전 6시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컴컴한 어둠을 뚫고 검은색 세단이 속속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임원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에선 두 분기 연속 최고 실적을 냈다는 축제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남들은 아직 집에 머물 시간인 오전 7시. 급한 업무를 마친 실무자들이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왔다. 고위 임원들의 회의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실무자들은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한 걸까.
삼성전자 본사는 물론이고 수원 등 전국 사업장의 주요 임원은 석 달 가까이 새벽 출근을 하고 있다. 3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지만 ‘비상’은 풀리지 않았다. 새벽 출근은 공교롭게도 2분기 사상 최고 실적을 낸 직후부터 시작됐다.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주요 임원들은 모두 출근한다. 추석 연후에도 하루만 쉬었다고 한다. 핵심 프로젝트였던 ‘갤럭시S3’ 개발팀원들은 “1년 중 추석과 설을 뺀 363일 출근했다”고 말할 정도다.
○ 철저한 성과주의가 원동력
전문가들은 삼성전자 구성원들이 이토록 헌신적인 것은 특유의 철저한 성과주의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 통신회사 임원은 “휴대전화 판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임원은 바로 다음 해에 교체되는 일이 다반사”라며 “경쟁업체에 비해 절박함의 수준이 다르다”고 평가했다. ▼ 스피드가 경쟁력… 임원실은 ‘실적 상황실’ ▼
믿기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랬다. 동아일보 산업부가 삼성전자 임원들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한 결과 2007년 임원 818명 중 3년 뒤인 2010년까지 남은 사람은 382명에 그쳤다. 올해까지 남은 임원은 251명이었다. 다른 계열사로 발령이 난 임원도 일부 있지만 5년 사이 70%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뜻이다.
삼성전자는 기술을 개발할 때도 하나의 과제를 두 팀에 맡겨 경쟁시킨다. 삼성전기 등 그룹 내 계열사에서 부품을 받을 때도 그룹 외부의 다른 기업과 경쟁하게 한다.
냉혹하지만 그만큼 공정하다. 다른 배경은 안 보고 실적만 따지기 때문이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에는 학연, 지연이 없다. 철저히 권한을 주고 성과만으로 평가한다”며 “경영진의 학벌이 다른 기업보다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과를 내면 철저히 보상한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실적만이 회사에서 버티고 승승장구할 수 있는 유일한 ‘빽(배경)’”이라고 말했다.
○ 세계 최고의 전략적 민첩성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TV 사업담당 임원의 방에는 전 세계 유통망의 판매 실적과 재고 현황을 보여주는 대형 TV가 걸려 있다. TV 속 숫자는 수시로 바뀐다. 베스트바이 등 외국의 대형 유통매장에서 제품이 얼마나 팔리고, 재고가 얼마나 쌓이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 시절 외부에서 무선 인터넷으로 이 시스템에 연결해 판매 실적을 파악하고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연락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적이 부진한 해외 지사의 담당자는 한국 시간으로 오전 5, 6시 경 어김없이 날아오는 ‘최지성 e메일’에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삼성전자에 부품을 공급하는 한 협력업체의 사장은 “다른 회사는 재고를 파악하는 데 꼬박 2주가 걸리는데 삼성전자는 실시간으로 한다”며 “부품을 주문해 생산량을 조절하고, 신제품을 내놓고 마케팅하는 속도는 다른 업체가 흉내도 내지 못할 수준”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선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창조보다는 애플이 만들어 놓은 시장을 추격하는 게 관건이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10년 기사에서 삼성전자를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지 못하는) 세일즈 머신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1등 기업의 DNA로 창조성보다 전략적 민첩성이 더 중요하다는 시각도 많다. 서원석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삼성을 패스트 팔로어라고 비하하는 사람이 있지만 시장이 열린다고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기업들이 자사의 정체성을 살리는 데 사로잡혀 있을 때 삼성전자는 소비자의 다양성을 받아들여 빠르게 변신해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 ‘수직계열화’의 힘
여러 전문가들은 삼성전자 특유의 수직계열화 체제를 스피드 경영의 원동력으로 꼽는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핵심 부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내부에 갖춰 제품 혁신과 개발의 속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 경쟁력을 바탕으로 삼성전자는 애플이 1년에 한두 차례 새 모델을 내놓는 동안 형태와 화면 크기를 다양화한 수십 종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선보여 시장점유율을 역전시켰다.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꾸준히 투자하는 것도 삼성전자의 강점이다. 수직계열화 덕에 시장 상황이 안 좋아도 집중적 투자가 가능하다. 실제로 2010년 3분기에는 반도체 사업이 전체 영업이익의 70%를 차지하며 스마트폰 사업의 지속적 투자를 가능케 했고, 지금은 스마트폰 사업이 영업이익의 70%를 내며 반도체 등 다른 분야의 투자를 견인하고 있다.
박강호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수직계열화는 기술의 융합이 필요한 정보기술(IT) 분야에 특히 강점이 있다”라며 “시장을 창조하지 못하더라도 집중적 투자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수직계열화 시스템이 성공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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