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주방용품 中企퀀텀바이 박지연 대표의 ‘스펙 없이 사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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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나왔다, 아이 엄마다”… 당찬 그녀에게 세계가 놀랐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퀀텀바이 박지연 대표. 수상작인 ‘키친 아이시클’은 조리도구 손잡이에 자석을 붙여 조리 과정에서의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퀀텀바이 박지연 대표. 수상작인 ‘키친 아이시클’은 조리도구 손잡이에 자석을 붙여 조리 과정에서의 동선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직원 4명의 소규모 디자인 업체 ‘퀀텀바이’ 사무실에 7월 국제우편 한 통이 도착했다. 빨간색 봉투에는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기껏해야 응모해 줘서 고맙다는 편지겠지 뭐. 자기가 한번 뜯어 봐.” 한창 작업 중이던 박지연 대표(33·여)가 우편물을 내미는 직원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표님, 우리 제품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을 받았다는데요? 이거 상장이에요!”

놀란 박 대표가 받아 든 상장에는 퀀텀바이의 ‘키친 아이시클(kitchen icicle)’이 디자인 콘셉트 부문 최우수상(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고 적혀 있었다. 키친 아이시클은 국자, 뒤집개 등 조리도구 손잡이에 자석을 붙여 가스레인지 후드에 쉽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한 퀀텀바이의 첫 작품이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퀀텀바이 등 수상업체를 싱가포르로 초청해 19일 시상식을 가졌다.

○ 나는 지방대 출신이다

LG전자 디자인센터 출신인 박 대표는 지난해 10월 회사를 나와 퀀텀바이를 설립했다. 그리고 창업 1년 만에 대기업들도 받기 어렵다는 최고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그는 사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잘나가는 데 필요하다는 ‘스펙’은 내세울 만한 게 없다고 했다.

디자인 업계에서 알아주는 서울대나 홍익대 출신이 아니다. 그저 미(美)에 관심이 많아 19세 때 대구 집에서 가까운 계명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다녀온다는 해외 유학도 가보지 않은 순수 토종파다. 대학 시절 그 흔한 공모전에 응모해 본 적도 없다. 남들이 다 낸다는 이유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그의 자기소개서 속 경력이라고는 대학 3학년 때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한 삼성 디자인 인턴십 프로그램인 ‘삼성디자인멤버십’ 한 줄이 전부다. 당시 10여 명의 인턴 동기 가운데 여자 지방대생은 박 대표뿐이라 삼성 측에서 그를 위한 작업실 겸 숙직실을 따로 만들어 줬을 정도다. 박 대표는 “전문 디자인 연구팀과 함께 제품의 사용자 디자인(UI)부터 패키지까지 제작해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이 나 숙직실에서 며칠을 지새우며 작업만 했다”고 회상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LG전자에서도 그는 ‘인(in) 서울’ 대학 출신들과 겨루며 최연소 팀장 자리를 꿰찼다. 7년 동안 엑스캔버스 TV 등 LG전자 대표 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그는 ‘남이 시켜서 하는 디자인은 싫다’는 생각으로 2009년 돌연 사표를 썼다.

○ 나는 ‘워킹맘’이다

경쟁 업체들의 숱한 스카우트 유혹을 모두 물리친 그는 잠시 디자인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오랜 꿈이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개업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목 좋은 자리를 구하고 인테리어까지 계획대로 착착 진행하던 중 예기치 못한 반전이 생겼다.
▼ “딱 걸렸어~” 아이 밥해주다가 아이디어 번득 ▼

첫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유난히 심한 입덧 때문에 레스토랑 개업의 꿈은 결국 접어야 했다. 아이를 가진 채 식당을 운영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기도 했다.

한때는 임신 사실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엄마가 된 것이 그에게 다시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선물했다. 우연히도 그가 아이를 맡기러 간 어린이집이 창업을 꿈꾸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경기여성능력개발센터 건물 내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의 꿈을 펼쳐 보세요’라는 창업 안내 포스터를 보게 됐다. 잊고 있던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이 다시 꿈틀댔다. 이번엔 정말 자신만의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다.

10 대 1이 넘는 만만치 않은 경쟁률을 뚫고 지난해 입소에 성공한 그는 센터에서 제공한 10여 평의 작은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작명 작업부터 시작했다.

“너무 거창하지 않더라도, 작은 발상의 전환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은 에너지(퀀텀)가 곱절이 돼(바이) 최고의 에너지를 낸다’는 의미로 회사 이름을 지었죠.”

LG전자 출신인 그가 반년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첫 작품은 전자제품이 아닌 주방용품이었다. 네 살 아들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취미이자 가장 큰 행복인 그가 평소 엄마이자 주부로서 느꼈던 불편함을 디자인으로 해소한 게 키친 아이시클이다. 그는 대부분 부엌의 가스레인지 후드가 철제로 돼 있다는 점에 착안해 국자, 뒤집개, 양념통 등 주방에서 가장 자주 쓰는 도구의 손잡이 부분에 자석을 붙였다.

박 대표는 “보통 뚜껑 달린 양념통을 싱크대 서랍에 넣어 두고 쓰는데 그러면 조리할 때마다 서랍을 열고 양념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닫는 등 8가지 동선을 거치게 된다”며 “자석 달린 양념통을 후드에 붙였다 떼면 동선을 3단계로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엄마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상상력”이라고 했다.

○ 나는 중소기업 사장이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 업계에서 중소기업이 순수하게 제품 하나만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디자인 사업마다 응모했지만 ‘줄탈락’의 쓴 경험을 했다. 아무래도 수상 경력이나 정부 지원 등 ‘스펙’에서 밀리는 신생 업체는 불리했다. 일부 심사위원은 “정보통신 기기나 애플리케이션도 아니고, 돈도 안 되는 주방용품에 왜 세금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차가운 반응도 보였다.

‘결국은 또 스펙 문제인가’라고 고민하던 박 대표는 일단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영국의 ‘조셉조셉’이나 덴마크의 ‘스텔톤’ 등 디자인을 강조하는 유럽 주방용품 업체가 인기를 끌고 있는 만큼 해외에서 성공한 뒤 한국 시장에 재도전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해외 진출에 앞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 제품을 응모했다. 그의 디자이너 인생에서 처음 참가해 본 공모전이었다. 그리고 2주 뒤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장이 날아온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의 경력보다는 순수하게 제품의 디자인 자체를 높게 평가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요즘도 여성능력개발센터로 아들과 함께 출근한다. 일이 많아 야근을 해야 할 때면 아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그가 새로 뽑은 직원 3명 모두 명문대 출신이 아니다. 워킹맘 대표에, 잘나가는 스펙을 가진 직원은 없는 중소기업이 앞으로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말한다. “이제까지 스펙 없이도 실력으로 잘 버텨 왔잖아요. 온갖 악조건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도 더 잘되게 해야죠.”
::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

세계 우수 디자인 제품을 선정해 시상하는 디자인상으로 1955년 제정됐다. ‘IF 디자인상’, ‘IDEA 디자인상’과 함께 권위 있는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힌다. 올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는 세계 56개국에서 3672개 작품이 경쟁을 벌여 최종 217개 작품(우수상 이상)이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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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기자 jhk85@donga.com
#퀸텀바이#레드닷#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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