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6시 30분 경기 화성시 정남면 IBK기업은행 화성정남지점. 조명희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치자 조용하던 사무실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개인용컴퓨터(PC)의 자판 소리가 커졌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20분이 흐르자 PC에 ‘업무 종료 10분 전입니다’라는 자막이 떴다. 서류를 만지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7시가 되자 PC가 꺼졌다. 서류 정리정돈을 끝낸 직원들은 하나둘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떠났다. 15분 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정남지점 사무실 셔터가 내려졌다.
마지막에 사무실을 나선 조 과장은 “헬스장을 들렀다가 집에 갈 예정이다”며 “3, 4년 전만 해도 밤 12시까지 사무실에 머물러야 했는데 이제는 저녁에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돼 좋다”고 말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009년부터 ‘PC오프제’를 도입한 기업은행의 전국 모든 지점에서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오후 7시 ‘칼퇴근’을 유도하기 위해 PC를 강제로 끄고, 야근이 필요한 사람은 지점장의 사전결재를 받도록 한 게 핵심이다. 이후 불필요한 보고서나 회의가 줄어들고 생산성은 올랐다. 직원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기업은행의 성공을 눈여겨본 다른 은행들도 PC오프제 동참에 나설 예정이어서 칼퇴근 풍경은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또 ‘긴 노동 시간과 낮은 생산성’으로 요약되는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 습관적인 야근, 떨어지는 능률
한국인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44.6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길다.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은 23위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은행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성정남지점은 2008년까지 평균 퇴근시간이 오후 11시 40분이었다. 공단에 위치한 특성상 중소기업의 대출 비중이 높아 신용분석보고서나 대출약정서 등 작성할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본점도 사정은 비슷했다. 매일 저녁 구내식당은 야근자들로 바글거렸다. 인터넷 검색을 하며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상사가 퇴근해야 집에 가는 직원도 적잖았다. 반복되는 야근을 하면서도 시간외수당은 신청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야근을 관례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피로는 누적되고 능률은 떨어졌다.
2009년 10월 기업은행은 이런 관행을 깨기로 하고, 칼을 뽑았다. PC오프제를 도입한 것이다. 초기에는 ‘기존의 야근 없애기 캠페인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노조가 확성기를 들고 사무실 곳곳을 돌며 ‘근무시간을 줄이자’고 외치고, 사내 방송으로 야근 줄이기 메시지를 줄기차게 내보냈지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은행들은 ‘무식한 방법’이라며 비아냥거렸다.
○ PC가 꺼지자 변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상황은 이들의 예측과 다르게 흘러갔다. 업무 처리에 필수적인 PC가 꺼지고 원칙적으로 야근이 허용되지 않자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빈둥거릴 수 없게 됐다. 당장 근무문화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보고를 위한 보고’가 사라졌다. 김경희 반월지점장은 “예전에는 보고서 형식이나 글자 크기가 잘못됐다며 몇 번씩 수정을 요구하는 상사도 있었다”며 “요즘에는 일할 시간이 빠듯하다 보니 핵심만 요약한 메모식 보고서를 많이 쓰게 된다”고 전했다.
의사 결정 속도도 빨라졌다. 김재홍 화성정남지점장은 “업무처리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부하직원이 보고하는 자리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시간은 짧아졌다. 예전에는 저녁 먹고 회사로 들어와 3, 4시간 회의를 하는 지점이 많았다.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내용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퇴근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PC오프제 이후 출근 직후인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오전회의는 길어도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내용도 직원들이 공유해야 할 중요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내실을 다졌다. 사무실 한곳에 모여 서서 10분 정도 대화하는 ‘스탠딩 회의’가 확산됐다. 권선주 기업은행 리스크관리본부장은 “간부들은 불필요한 회의나 보고서에 투입할 시간에 고객을 한 명 더 만나라고 한다”고 전했다.
은행도 제도적으로 거들고 나섰다. 부서장의 업무실적 평가에 직원 퇴근시간을 포함시켰다. 평가비중이 전체 점수의 3%로 작지 않다. 승진심사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정도다. 조준희 기업은행장은 퇴근시간이 지속적으로 늦은 지점장들을 본점으로 불러들여 “단순히 시간만 투자하면 성과가 높아질 것이라는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줄기차게 당부했다. 지인(知人) 대상 영업 관행도 없앴다. 반월지점에 근무하는 윤장원 대리는 “예전에는 낮 시간에는 일반 회사업무를 보고, 저녁에는 카드나 방카쉬랑스 고객 유치를 위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려야만 했다”며 “지인 영업이 없어지니 야근이 확실히 줄었다”고 말했다. ○ 당겨진 퇴근시간, 오르는 업무능률
PC오프제가 가져온 가장 확실한 변화는 퇴근시간이다. 평균 오후 9시가 넘었던 퇴근시간이 오후 6시 57분(9월 말 현재)으로 앞당겨졌다.
PC오프제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시화옥구지점의 유영주 계장은 “퇴근 후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거나 남편과 동네 공원을 산책한다”며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봤던 직장인의 생활이 이제는 나의 일상이 됐다”고 자랑했다. 오산지점에 있는 김진 계장은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낮아져 업무시간 능률이 많이 오르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은행권 노사는 기업은행의 사례를 벤치마킹해서 내년부터 PC오프제를 전면 실시하기로 했다. PC가 꺼지는 시간이나 PC 종료 시간에 대한 평가 비중은 개별 은행 노사가 다시 협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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