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서 18년 일했다’는 얘기로 다 통할 줄 알았다. 이력서만 내면 면접 일정이 잡힐 줄 알았다. 하지만 10곳에 이력서를 내면 9곳에서는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나머지 한 곳도 면접장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채용하기 힘들다는 설명만 듣고 나와야 했다.”
지난해 12월 1일자로 삼성생명에서 명예퇴직한 장정욱 씨(44)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쓴 수기의 일부분이다. 그는 ‘새로 도전하려는 회사 업무와 관련된 경력도, 자격증도 없이 삼성 근무경력만 믿고 덤볐구나’ 하는 쓰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신문에서 NH농협생명이 출범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 예전에 받던 대우는 잊어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울 게 없었다.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책임자를 꼭 한번 뵙고 싶다”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정식으로 이력서를 내세요”라며 황당해했지만 굴하지 않고 8차례 더 전화하고 e메일도 보냈다. 결국 지역 총국장과 면담할 수 있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월부터 NH농협생명 경력전문직으로 일하고 있는 장 씨는 “열정을 보여준 덕에 취업할 수 있었다”며 “다른 분들께도 ‘이력서나 한번 내 볼까’ 하는 마음으로 구직활동을 하면 백전백패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지난달 실시한 ‘중견인력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에는 장 씨를 포함해 모두 40여 명이 자신의 재취업 성공담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며 글을 보내왔다. 이 수기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예전 직장에서의 대접을 빨리 잊고, 규칙적인 생활을 지키고, 일자리를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6월 대기업에서 퇴직한 공인복 씨(59)는 60여 개 회사에 지원서를 냈지만 단 한 곳에서만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월 2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영혼도 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재취업은 ‘내가 이런 하찮은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알량한 자존심을 버린 것에서 시작했다. ‘서울대를 나오고 대기업 상무를 지낸 나를 인정해줄 회사가 있겠거니’ 하는 착각을 거둔 그는 “한때 학력을 중졸이라 속여 이력서를 낼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취업박람회와 전직지원센터, 고용센터에 수시로 찾아가 새로운 정보가 없는지 발품을 팔았다. 결국 90번의 도전 끝에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공 씨는 “전 직장에서의 직위와 연봉으로 나를 초빙하려는 회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재취업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 재취업은 장기전… 90차례 도전 끝에 제2의 인생을 열다 ▼
○ 규칙적으로 생활하라
수기를 낸 중견인력들은 “칩거에서 벗어나라, 위축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일과의 규칙을 정해 생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의 김동준 수석컨설턴트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해 집에만 있다보면 자연히 가족과도 마찰이 잦아진다”고 경고했다.
오병욱 씨(49)는 실직 상태에서도 직장인과 똑같은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오전 9시면 도서관으로 출근했고 오후 6시에 귀가했다. 도서관에서 기술서적과 영어공부를 병행하고 평소 읽고 싶던 책도 읽었다. 그는 “게을러지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고, 집에서 일 없이 머물면 우울증에 빠질 것만 같았다”며 “구직을 장기전이라 여기고 규칙적인 일상이 몸에 배게 했다”고 말했다.
벌이를 위해 낮에 일용직으로 출근하는 날에도 밤에 돌아와 공부를 했다. 오 씨는 “100세 시대에 아직 절반밖에 살지 않았는데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취업이라는 목표를 정했으면 꾸준히 노력해야 결실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구직활동을 하며 체중이 10kg 이상 빠졌다는 이은수 씨(가명)도 “오전 7시에 일어나 가벼운 산책을 하고 식사를 마친 후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며 “규칙적인 스케줄이 몸에 배어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고 말했다.
○ 구직 중임을 적극적으로 알려라
최우수상을 받은 진용기 씨(48)는 ‘가만히 있으면 누가 직장을 구해주나’ 하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전 직장 동료가 그가 직장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 업체인 영림원소프트랩에서 컨설턴트를 구한다는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진 씨는 전경련의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여한 첫날, KBS의 ‘대한민국 50대 보고서 절망과 희망 사이’에도 출연해 구직 사실을 알렸다. 방송 후 많은 사람이 “잘될 것이다. 힘내라”고 격려를 보내준 것도 큰 힘이 됐다. 진 씨는 “만약 내가 실직당한 상태를 부끄러워해 교육받는 것을 감추고 다녔다면 격려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전 동료에게서 직장을 소개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준 수석컨설턴트는 “40, 50대 재취업의 80% 이상은 지인 추천으로 이뤄진다”며 “친구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란 뜻이 아니라 ‘지금 취업할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만 말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강조했다.
‘나 일자리 구한다’고 주변에 알리는 것은 퇴직의 억울함과 분함을 털어버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대용 씨(51)는 지난해 10월 외국계 중견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있다 권고사직한 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을 쫓아낸 회사에 대한 원망이 마음을 갉아먹었다.
‘나 혼자만 망가질 순 없다. 같이 죽자.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갖은 잔인한 방법을 상상하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이 괴물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계속 그런 맘이라면 당신이 지는 거야! 지금껏 살아왔던 멋진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라고 위로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김 씨는 “마음이 평온해져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게 됐다”며 “가족의 격려와 응원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경련은 이들의 재취업 성공수기 40편을 묶은 ‘인생 후반전, 다시 비상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19일 출판한다. 전경련 중견전문인력종합고용지원센터와 전국 일자리센터에서 무료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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