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주부 박모 씨(55·여)는 3년 전 큰딸 결혼 때 혼수로 받은 10돈(37.5g)짜리 순금 열쇠를 팔기로 결심했다. 전세금이 올라 고민하는 딸 부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박 씨가 갖고 있는 순금 열쇠는 사위가 세공비 20만 원을 포함해 200만 원을 주고 산 제품이었다. 3년 사이 국내 금값이 40% 이상 올랐다는 소식도 있어 박 씨는 순금 열쇠를 팔면 최소한 50만 원 이상 수익을 낼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금은방에서 제시한 가격은 198만 원. 순금 열쇠의 보관상태가 썩 좋지 않은 데다 순도(純度)를 보장하기 어려워 가격을 높게 쳐주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 씨는 “순금이라고 해서 비싸게 샀는데 막상 팔 때가 되니 순도를 보장하기 어려워 가격을 높게 쳐주기 어렵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이 ‘안전한 투자처’로 각광받으면서 한동안 국내에서는 ‘금(金)테크’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금값이 치솟는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 있던 금제품을 팔려고 나선 소비자들은 정작 기대만큼 높은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 품질이나 순도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데다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금이 많은 불투명한 금 유통시장의 구조 때문이다.
소비자가 금을 팔 때 받는 가격은 도매업체가 국제 금 가격에 환율을 반영해 정하는 도매가격에 유통비와 금은방의 영업마진을 얹어 결정된다. 대부분의 금은방은 비슷한 도매가격을 기준으로 금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금의 순도와 중량이 같으면 소비자가 금을 팔면서 받는 돈도 큰 차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가 13일 전국 금은방에 문의한 결과 소비자가 금을 팔 때 가격은 지역별, 금은방별로 천차만별이었다. 서울과 부산은 순금 골드바 10돈에 최저 220만 원을 제시했지만 광주의 한 금은방은 217만 원, 울산은 최저 207만 원에 사겠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이처럼 소비자들이 금을 팔 때 가격이 제각각인 것은 일정한 품질 인증기준이 없어 금은방에서도 순도를 자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4K 순금은 금 함량이 99.9%여야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지만 시중에는 금 함량이 99.5%나 99.0%인 금도 순금으로 판매되고 있다. 한 금은방 주인은 “같은 무게의 순금제품이라도 순도가 떨어지는 것은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순도가 떨어지는 금이 섞여 있을 가능성에 대비해 금은방이 자체적으로 시세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국내유통 60% ‘소비자가 되판 金’… 탈세 막을 법안은 2년째 표류 중 ▼
실제로 최근 한 감정원이 올해 7, 8월 판매된 금에 대한 함량검사를 한 결과를 보면 판매된 순금 가운데 금 함량이 99.9%인
제품은 23.5%에 불과했으며 함량 99.5% 이하인 제품은 39.0%에 이르렀다. 온현성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장은 “국제
금시장에서는 순금 제품의 함량(99.9%)을 엄격히 지키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함량이 적은 순금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며 “함량
오차에 따른 비용을 소비자가 부담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 국내 금 유통량 60% 이상 무자료
순도가 떨어지는 18K(금 함량 75%)나 14K(금 함량 58.5%) 금제품은 금 함량이 더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살 때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되팔 때는 제값을 받기 어렵다.
얼마 전 50만 원을 주고 산 18K 금반지(한 돈)를 팔기 위해 최근 금은방을 찾은 강모 씨(28)는 “16만 원을 주겠다”는
금은방의 제안에 발길을 돌렸다. 되팔 때의 가격이 살 때 가격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을 살 때
신용카드로 결제하거나 현금영수증 발급을 원하는 소비자에게 높은 가격을 받는 관행도 여전했다. 동아일보 기자가 고객인 것처럼
골드바 10돈의 가격을 문의한 결과 일부 금은방은 현금으로 결제할 때는 234만∼239만 원을 제시했지만 신용카드로 구입한다면
260만∼264만 원을 불렀다. 부가가치세 10% 등의 세금과 함께 웃돈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영수증 없이 거래되는 금제품은 탈세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금은 120∼150t로 이 가운데 60∼70%가 자료 없이 비공식적으로 거래되고 있다.
국내 금시장이 이처럼 불투명한 것은 왜곡된 금 유통시장 구조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금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이 중 금광석으로부터 제련한 금은 5%, 외국에서 수입한 금은 35%이며 나머지 60%가량은 소비자들이 되판 금제품을
녹여 만든 정련금이다. 하지만 이들 정련금 대부분은 거래 기록이 없다. 도매상들이 소비자들로부터 금을 사들인 다음 이를 도매상에
넘기면서 거래 자료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 정부의 금시장 양성화 2년째 표류
전문가들은 국내 금시장을 정상화하려면 금 거래를 양성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정부 역시 2010년 금시장 양성화 방안의 하나로 한국거래소 안에 ‘금 현물 거래소’를 설립하겠다고 했다. 금 현물 거래소가
설립되면 거래소를 통해 거래되는 금은 정부가 지정한 품질인증기관을 통해 순도를 인증받아야 하므로 금의 순도를 둘러싼 혼란을 막을 수
있다. 또 금에 투자하려는 소비자는 거래소를 통해 금을 산 뒤 이를 되팔 때까지 예탁결제원에 금을 맡길 수 있어 집에서 보관할 때
발생하는 뜻밖의 손상으로 금을 싸게 되팔아야 하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금 현물 거래소 설립을 위해
지식경제부가 입법예고한 ‘일반상품거래법’ 제정안은 2년이 넘도록 아직 국회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법제처 심사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따라 당초 올해 1월로 예정됐던 금 현물 거래소 설립도 기한 없이 지연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금시장과
관련해 처음 제정되는 법인 데다 이해당사자들이 많아 규제개혁위원회 검토를 거쳐 법제처 심사를 받는 과정이 오래 걸리고 있다”며
“올해 안에 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내년까지도 금 현물 거래소 설립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금
도매업체나 유통업체들은 무자료 거래를 줄이기 위해서는 금을 거래하는 데 붙는 세금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동수
한국귀금속유통협회 회장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금에 부가가치세와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금을 양성화하려면 세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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