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경제가 뚜렷한 회복 조짐을 보이지 않자 재계가 계열사를 정리하고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불황 장기화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 등 대통령선거에 나선 ‘빅3’의 강도 높은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기업 경영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경제계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재계는 특히 세 후보 모두 공약으로 내건 집단소송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 주목하고 있다. 경영에 상당한 부담이지만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강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간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 줄이고 또 줄이고
18일 동아일보 산업부가 주요 대기업의 경영 현황을 조사한 결과 삼성그룹은 2008년 59개였던 계열사를 현재 80개까지 늘렸지만 내년 상반기(1∼6월)까지 4개를 정리할 계획이다. 삼성 광통신이 다음 달 삼성전자에,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만드는 SB리모티브는 삼성SDI에 각각 합병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장비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의 자회사 세메스는 계열사인 세크론과 지이에스를 합병해 하나의 회사가 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계열사 인수합병은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며 “내년에도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이 계속되면서 계열사를 늘리기보다는 줄이는 방향의 보수적 경영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LG그룹은 현재 64개의 계열사 가운데 연말까지 6, 7개를 매각하거나 유사 기업 간 합병을 추진한다. 해외자원 개발에 주력하기로 한 LG상사는 픽스딕스, 트윈와인, 지오바인의 청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LG생활건강도 무역업 자회사 윈인터내셔널과 플러스원을 정리하고 있고 ㈜LG는 지아웃도어, 벅스컴애드를 청산할 예정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08년 37개였던 계열사를 2011년 4분기(10∼12월) 63개까지 늘렸지만 올해 들어 이를 57개로 줄였다. 지난해 인수한 현대건설의 자회사 21개 가운데 특수목적법인(SPC) 수가 감소한 게 1차적인 이유지만 경기 침체에 대비한 내실경영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포스코의 계열사인 포스코에너지는 이달 말에 흡수 합병하는 포항연료전지발전, 신안에너지를 포함해 계열사 10여 곳 간에 합병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올해 초 78개였던 계열사를 내년 말까지 72개로 줄인다.
경기 불확실성 때문에 기업들의 설비투자도 주춤한 상황이다. 산업연구원이 17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직전 분기와 비교한 국내 설비투자는 올해 2분기(4∼6월)에 7.0% 감소했고 3분기(7∼9월)에는 다시 4.3% 줄어들었다.
○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에 ‘끙끙’
재계는 대선후보들이 한목소리로 도입하겠다고 공약한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서는 반대할 명분이 약해 속앓이만 하고 있다. 두 제도는 미국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오래전에 정착됐다. 집단소송제도는 한 명의 피해자가 가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면 다른 피해자들은 따로 소송에 참여하지 않고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지만 기업으로선 적지 않은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유통 전자 분야 등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업의 상당수는 집단소송에 대비한 별도 예산 책정을 검토하고 있다”며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천문학적인 소송비용은 물론이고 기업 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가해자의 악의적인 위법행위에 대해 실제 손해보다 훨씬 많은 손해배상금액을 부과하는 제도다.
이에 대해 재계는 각종 소송이 늘어나며 변호사들만 배불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집단소송제의 범위를 구체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의 최고 배상한도를 정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긍정적 측면도 있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부담이 커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기업의 준법경영 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삼성그룹은 최근 사장단회의에서 전 계열사 차원의 ‘준법경영’을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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