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충남 당진시 외곽의 한 배추밭. 아침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배추수확 작업이 한창이었다. 배추 밑동을 자르고 망에 나눠 담아 차에 싣는 것 전부 농협에서 고용한 인부들의 몫이다. 이 배추들을 키운 농민 구본일 씨(61)는 바라만 볼 뿐이다. 구 씨는 본격적인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시작된 극심한 배추가격 변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3개월 전에 미리 계약을 했기 때문에 요즘 배추가 얼마에 팔리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 조합원의 가격 변동 위험 덜어줘
구 씨가 계약재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농협의 ‘채소사업소’ 덕분이다. 정부와 농협은 2010년 말 배추가 포기당 1만5000원까지 치솟은 이른바 ‘배추 파동’을 겪은 뒤 계약재배의 필요성을 실감해 이듬해인 2011년 1월 농협중앙회 산하에 채소사업소를 신설했다.
채소사업소는 무와 배추를 대상으로 수확 2∼3개월 전에 전국 개별 농가들과 일정량을 특정가격에 구입하기로 계약을 한다. 이수희 채소사업소장은 “밭에서 나온 배추의 상태나 수확 당시 시세와 관계없이 미리 정해놓은 가격에 100% 거래하기 때문에 조합원(농민)들의 걱정이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밭에서 이뤄지는 수확 작업뿐만 아니라 판매처 확보, 물류 등 배추를 파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와 비용은 농협이 책임진다. 이날 수확한 배추는 채소사업소와 거래하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산물시장이나 김치공장으로 옮겨져 거래됐다.
구 씨는 올해 8월 배추밭에 씨를 뿌리자마자 채소사업소에 포기당 약 800원에 팔기로 계약을 했다. 채소사업소 측은 지난해 이맘때 포기당 500원에 배추를 구입했지만 올해는 재배면적 감소와 여름철 태풍의 영향 등을 고려해 산지 가격을 올렸다.
계약재배 방식은 특히 배추가격이 급락했을 때 농민들에게 확실한 안전판 역할을 한다. 구 씨는 “작년 가을 배추가격이 크게 떨어져 유통업자들은 포기당 300원에도 배추를 안 사갔지만 농협은 원래 약속한 500원에 전량을 가져갔다”며 고마워했다.
○ 수급 조절로 소비자물가 안정
채소사업소는 농협 조합원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상생(相生)의 모델로 평가받는다. 채소사업소 측은 시장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확보한 물량을 가락동 시장 등 도매시장에 집중적으로 풀어 가격급등을 막는다.
이 소장은 “일반 유통업자들은 가격이 오르면 물량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가격을 더 올려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이익보다 소비자물가 안정이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배추 파동이 있었던 2010년에 상품(上品) 기준으로 평균가격이 최고였던 달과 최저였던 달의 소비자가격 차이는 1만1600원이었다. 이에 비해 채소사업소 사업이 안정궤도에 올라선 올해 들어 9월까지 최고인 달과 최저인 달의 차이는 7500원으로 줄었다.
현재 이 소장을 포함해 7명의 채소사업소 현장 직원이 강원, 전남 등지의 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수확, 물류 현황을 일일이 챙기고 있다. 1년에 차로 6만∼7만 km를 돌아다니다 보니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을 빼고는 늘 지방출장으로 집을 비우지만 보람도 크다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이 소장은 “계약단가를 무리하게 낮추거나 마진율을 높일 수 없어 흑자를 내긴 어렵다”라면서도 “조합원인 농민과 소비자인 국민의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는 만큼 정부와 협력해 사업 규모를 점차 늘려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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