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직원들을 ‘철밥통’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가만있어도 정년이 보장된다는 의미였다. 집 전화 가입자의 약 90%는 KT 고객이었다. 전화기 제조회사나 장비업체들이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KT를 거쳐야만 했다. KT는 ‘울트라 슈퍼 갑(甲)’이었다.
황금기가 지나고 주 수익원인 집 전화 매출액이 매년 4000억∼5000억 원씩 줄어도 직원들은 변화에 둔감했다. 5년 앞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회사 안팎에서 나왔지만 고민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철밥통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2009년 1월 취임한 이석채 회장이 총대를 멨다. 그는 안팎의 저항을 딛고 ‘혁신 전도사’를 자임했다. 1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이 회장은 “(지난 4년은) 살기 위해 발버둥친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3년 임기를 마친 뒤 올해 3월 연임이 된 것은 일부의 반발에도 뚝심 있게 혁신을 추진해 온 결과라는 얘기였다.
이 회장은 “2000년대 중반까지 KT와 자회사 직원 5만여 명은 이익의 70∼80%를 창출하는 집 전화에만 매달렸다”며 “이 수익구조가 무너지면서 KT는 사실상 죽은 기업, 생명이 끝난 기업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2007년 5조8000억 원이던 KT의 집 전화 매출액은 1년 만에 5조4000억 원으로 감소했다. 자회사인 KTF는 2008년 8조 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만년 2위에 머물렀다. 새로 추진한 인터넷TV(IPTV)의 미래도 밝지 않았다.
이 회장은 “기업으로선 가장 무서운 것이 주력 비즈니스의 붕괴”라며 “IBM이나 AT&T,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몰락은 모두 주력 사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취임 초기부터 체질 개선에 집중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9년 희망 퇴직을 통해 직원 6000여 명을 줄이고 KT와 KTF를 합병했다. 그해 말 ‘아이폰’을 들여와 국내에 스마트폰 열풍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수십 년간 KT의 상징이었던 파란색을 버리고 정열적인 붉은색으로 갈아입었다. 이 회장은 “초기에 구성원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만약 합병하지 않았더라면 KT 주식은 지금 휴지조각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해 관계자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의 행보를 두고 ‘정부 관료 출신의 한계’라거나 ‘겉은 바뀌었지만 속은 그대로’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회장은 수십 년을 따라다닌 ‘갑(甲)’의 이미지를 버리고 진심이 담긴 정책들을 내놓았다.
2010년 발표한 ‘3불(不)’, 그 이듬해 내놓은 ‘3행(行)’ 정책이 대표적이다. 3불은 중소기업의 기술과 자원을 빼앗지 않고, 이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3행은 소프트웨어 산업 성장을 위해 가치에 따른 구매와 경쟁력 강화에 힘쓰고 소프트웨어 업체들과 함께 글로벌 시장 진출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21개 기업이 함께하는 네트워크형 사회공헌활동 ‘드림 투게더’에도 집중하고 있다. ▼ “벤처들, KT 네트워크 타고 ‘가상재화’ 시장에 도전하길” ▼
이 회장은 BC카드, 금호렌터카 등을 KT의 새 가족으로 맞았다.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재벌 놀이를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라며 “통신과 다른 영역을 융합해 실질적인 정보기술(IT)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라고 강조했다.
금융과 통신을 결합해 모바일 상거래 시장을 성장시키려고 BC카드를 인수했고, KT금호렌터카 역시 차량에 설치한 각종 이동통신
장비에서 수집한 정보를 통해 고객에게 더 나은 위치기반서비스(LBS) 등을 제공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스카이라이프, 엔써즈,
유스트림 등도 콘텐츠 발굴과 빅데이터 전략 수립에 꼭 필요한 기업이라고 했다.
○ 글로벌 콘텐츠 유통기업 변화 목표
이 회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상재화(Virtual Goods) 시장이다. 가상재화는 전자책, 음원, 동영상서비스(VOD),
애플리케이션 등 네트워크 위에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디지털 형태의 상품을 말한다. 가상재화 시장은 매년 83%씩 성장해
2015년이면 세계시장 규모가 1568억 달러(약 17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회장은 가상재화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3월 ‘글로벌 콘텐츠 유통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연임이 확정된 뒤 2기 경영의 화두(話頭)로 내세운
것이 바로 가상재화다. 10월에는 영상콘텐츠를 지원하는 1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벤처 창업자들에게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이미 세워뒀던 계획을 착착 추진하고 있다. 그는 “전국의 유무선이 하나로 연결되고 그 위에 수많은
가상재화가 올라가 유통, 소비되는 시대에 KT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한 준비”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가상재화
시장에 승부를 걸기 위해 ‘롱테일 법칙’의 창시자인 미국 IT 매체 와이어드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펴낸 ‘메이커스’를 열독하고
있다. 이 책은 인터넷과 제조업을 결합해 다양한 틈새시장을 창출하는 3차 산업혁명 시대가 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대기업이 아니라도 아이디어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며 “그 인프라를 KT가 제공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회장이 ‘IT 역할론’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일본 등 선진국의 제조업이 무너지는데도 한국이 굳게 버틸 수
있는 건 IT 덕분”이라며 “IT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고 했다. KT 등 통신업계가 직간접으로 고용하고 있는 인력만 약
100만 명에 이르는 점만 봐도 IT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9월 출범한
ICT(정보통신기술)대연합 고문을 맡고 있다.
이 회장의 임기는 2015년까지다. 하지만 정권 말기인 탓에 임기를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에 대해 그는 “KT가 이제야 조금씩 능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안주하기엔 이르다”며
“혁신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최근 글로벌 경제전문 매체 CNBC로부터 ‘아시아 최고경영자
대상’을 받은 것도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을 좋게 평가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차이나모바일, NTT도코모, 텔레포니카, 보다폰 등
글로벌 업체들의 최고경영자가 KT의 달라진 모습을 보기 위해 직접 한국을 찾는 것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뼈를 깎는 노력의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회장은 “KT는 본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여기에 새로운 영역을 얹어 다시 태어난 몇 안 되는 기업”이라며 “확실한 새 역사를 쓰기 위해 임직원들에게 ‘프런티어가 되자’고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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