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최고경영자(CEO) 인사권, 투자 등 의사결정을 포함한 총수의 권한을 각 계열사 이사회에 대거 넘기는 ‘따로 또 같이 3.0’ 체제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그룹 주요 계열사 CEO와 사외이사 등 40여 명이 26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카디아 연수원에서 2시간여 동안 임원 세미나를 열어 ‘총수 경영’으로 대표되는 과거 경영체제를 버리고 계열사의 자율적 독립경영을 보장키로 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내년 1월 새 체제 출범과 함께 그룹 총수의 권한 대부분을 내려놓게 된다.
이날 세미나의 하이라이트는 구자영 SK이노베이션 사장을 시작으로 17개 계열사 CEO 21명(공동대표 포함)이 차례로 단상에 나와 ‘상호 협력방안 실행을 위한 협약서’에 서명하는 장면이었다.
지주회사와 각 계열사가 맺은 이 협약서에는 계열사의 재무관리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는 모두 각 계열사 경영진과 이사회에 이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 회장은 지난달 열린 1차 세미나에서 “앞으로 자기 회사의 일을 지주회사에 물어보지도, 가져오지도 말라”고 말하는 등 권한 이양 의지를 강하게 밝혀왔다.
최 회장은 이날 개회사에서도 “따로 또 같이 3.0 체제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시도여서 쉽지는 않지만 더 큰 행복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며 “좋은 지배구조로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SK그룹의 각 계열사는 또 해외 공동진출, 사장단 인사, 대외 홍보 등 그룹 차원에서 협력해야 할 사항은 △글로벌 성장 △인재 육성 △커뮤니케이션 △동반성장 △전략 △윤리경영 등 6개 분야 위원회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SK 측은 “협약서 체결을 통해 지주회사와 각 계열사의 CEO들이 새로운 경영체제에 합의했다”며 “계열사별로 2, 3개의 위원회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의 새로운 경영체제는 각 위원회의 인선이 마무리되는 내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각 계열사는 수백억 원 규모의 투자를 할 때도 최 회장은 물론이고 지주회사에 보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경영진과 이사회가 결정하게 된다. 그룹 간 교류가 많은 CEO급 인사를 할 때도 계열사 대표들이 모이는 인재육성위원회를 통해 결정한다. 지주회사인 SK㈜는 계열사가 얼마의 수익을 올렸는지, 재무 분야 성과만 점검하는 것으로 역할을 축소했다.
SK그룹 측은 “계열사별로 가장 효율적인 성장을 추진하면서 그룹 경영의 장점을 살리는 새로운 경영체제가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현재 60조 원 규모인 기업가치를 300조 원 규모로 늘리는 글로벌 성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SK그룹은 이번 경영 실험을 통해 총수가 소수의 지분만으로 전체 그룹을 좌지우지한다고 비판받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주회사 규제 강화 등 최근 강하게 부는 경제민주화 여론의 압력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최 회장이 SK이노베이션과 SK하이닉스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등 계열사 경영을 쥐고 있어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한다. 이에 따라 그룹 안팎에서는 향후 인사에서 최 회장 형제의 자리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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