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서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 과장은 ‘장돌뱅이 은행원’이라고 불린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일이 드물다. 고객이 콜센터로 금융 서비스를 신청하면 곧장 출동한다. 하루에도 서울과 인천, 경기 용인 등 수도권 각지를 누비며 대출상담과 예·적금 가입, 환전, 투자상품 판매 등을 도맡는다.
실적도 지점의 창구 은행원 못지않다. 최근에는 한 방송사 제작진 10여 명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이들을 SC은행의 급여 통장 고객으로 유치했다. 또 일부 고객에게는 기존의 연 7%대 대출을 연 4%대 초반의 낮은 금리의 대출로 갈아탈 수 있게 도왔다. 그는 “국내 은행 산업이 정체됐지만 외근이 많아서 따로 시간을 내 은행을 방문하기 힘든 고객 같은 틈새시장을 노리면 얼마든지 성장할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뱅킹의 확산으로 은행 지점의 창구 거래가 10건 중 1건꼴에 그치면서 지점의 영업 형태가 바뀌고 있다. 은행들은 지점을 벗어나 영업 공간을 확장하는 동시에 지점의 상담 기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2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금융권은 앞으로 인구가 줄어 은행 지점의 덩치 키우기가 무의미해질 것으로 보고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집중하고 있다.
○ 창구거래 급감…점포 다운사이징
SC은행에서 박 과장처럼 현장을 누비며 근무하는 직원은 ‘비즈니스 디벨롭먼트 컨설턴트(BDC)’라고 한다. 지점까지 찾아오기 불편한 고객들을 방문한다. 올해 1월 20여 명으로 시작해 29일 현재 185명으로 불었다. 이들이 올린 실적은 신규 고객 2만3000여 명, 대출 8660억 원, 예금 5250억 원에 이른다.
SC은행은 지점을 ‘다운사이징(크기 줄이기)’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 1, 2년 사이 전국 350여 개 점포 중 40여 곳을 330∼450m²에서 200∼250m²로 줄였다.
이는 은행 지점을 찾는 고객 수가 급감한 데 따른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 창구에서 하는 거래가 9월 말 현재 12.2%에 그친 반면 인터넷뱅킹이나 현금입출금기(ATM) 등 비(非)대면 거래가 87.8%에 이른다. 박종복 SC은행 소매채널사업본부 전무는 “기존에는 고객을 접하는 중심이 지점이었기 때문에 목 좋은 자리에 큰 점포를 내는 게 관건이었지만 인터넷뱅킹이 생각보다 빨리 확산되면서 고객이 원하는 곳으로 즉시 찾아가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소매금융에 뛰어든 KDB산업은행도 당초 전국에 200여 개 지점을 개설할 계획이었지만 최근에는 이를 120∼135개로 낮춰 잡았다. 한국보다 빨리 저출산, 고령화를 겪고 있는 일본의 사례를 검토한 결과 일정 수 이상의 지점을 내는 것은 과잉투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수재 산업은행 종합기획부장은 “개설 지점 수는 최소화하는 대신 고객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산업은행은 고객이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원하는 장소로 은행 직원이 찾아가 예금 계좌를 개설해주고 있다. ‘KDB다이렉트뱅킹’으로 불리는 이 서비스의 전담 직원은 현재 100명에 육박한다. 산은금융지주 계열사인 KDB대우증권을 비롯한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재활용하고 있다. 하반기(7∼12월) 들어 서울 중구 명동과 인천 부평 등의 7개 증권사 객장 안에 ‘꼬마점포’에 해당하는 지점 내 지점(BIB·Branch in Branch)을 설치하기도 했다. ▼ 金과장은 ‘장돌뱅이 은행원’ ▼
IBK기업은행은 지점의 주요 기능을 ATM으로 대체하고 있다. 기업은행은 KT의 전화부스에 ‘월세’를 내고 ATM을 설치해 고객 접점의 ‘밀도’를 높였다. 기업은행은 인천시와 제휴를 맺어 시내 버스정류장에도 ATM을 설치하고 있다. 기업은행 측은 “지점 개설에 투입되는 임차료와 인테리어 비용 등 막대한 초기 투자비를 감안하면 ATM 설치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 상담 비중 중요… 지점을 응접실로
오프라인 지점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는 온라인뱅킹이 확산될수록 은행원과 직접 얼굴을 맞대는 상담 역할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온라인 뱅킹의 역설’이다. 농협경제연구소가 고객 200명을 대상으로 은행 점포에 대한 고객 인식을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금융상품을 구매할 때 ‘점포 방문’이 58.7%로 가장 많았다.
이에 따라 시중은행들은 기존 점포를 응접실처럼 느낄 수 있게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하나은행은 서울 강남구 선릉역지점과 양천구 목동남지점 등 일부 점포를 라운지처럼 바꿨다. 대기 공간에 안락한 소파를 갖다놓고 TV도 설치해 응접실처럼 꾸몄다.
KB국민은행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제금융센터(IFC)에 금융상담 위주의 지점을 개설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이 지점에 들어서면 여느 지점과 달리 창구에 직원이 없고 기계가 고객을 맞는다. 통장 개설이나 재발급, 금융정보 확인, 현금카드 발급 등 단순 거래를 고객 스스로 할 수 있게 했다. 그 대신에 상담실 4개를 마련해 직원 5명이 응대한다. 프라이빗뱅킹이나 우수 고객이 아니더라도 독립된 공간에서 상담할 수 있다.
영업시간을 파괴해 고객과의 대면 접촉을 늘리는 은행도 늘어나고 있다. ‘은행 영업시간은 오전 9시∼오후 4시’라는 틀을 깨고 시간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국민은행은 회사원이 밀집한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와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영업시간이 낮 12시∼오후 7시인 직장인 특화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업무 시간에 오지 못하는 회사원 고객을 붙잡기 위한 전략이다. 우리은행도 서울 동대문구 두산타워 쇼핑몰에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여는 점포를 개설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앞으로 인구구조가 바뀌고 스마트뱅킹 이용자가 늘어나는 등 은행 거래 형태의 변화에 따라 지점의 변화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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