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회사 디자이너들의 대화가 아니다. 11월 28일 서울 중구 수하동 페럼타워에 있는 철강회사 유니온스틸의 디자인실. 디자이너 3명이 붓으로 그린 듯한 연분홍 꽃잎과 원목 나뭇결이 살아있는 패턴 등 다양한 문양을 늘어놓고 한창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 회색 옷 벗고 패션을 입은 철
차가운 잿빛 금속에서 벗어나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컬러강판이 최근 건축자재와 가전제품의 소재로 인기를 얻으면서 ‘철강 디자이너’라는 독특한 직종이 생겼다. 대부분 다른 업종에서 제품 디자인으로 경력을 쌓은 이들은 강판에 특수 도료로 그림이나 색깔, 무늬를 입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수많은 실패 과정을 거쳐 강판에 아름다운 무늬가 완성된다. 다른 제품과는 달리 아무리 아름다운 디자인을 구상해도 특수 도료로 철판 위에 찍어낸 결과물은 색이나 모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린 강판에 연속해서 같은 품질의 무늬를 찍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보련 디자이너는 “원하는 품질로 인쇄될 때까지 공장에서 밤을 새우며 수십, 수백 번 찍는 과정을 반복해 길게는 6개월에 걸쳐 탄생되는 디자인도 있다”고 말했다.
가전에 사용되는 강판 디자인은 제품 이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이들은 생활 곳곳에서 제품을 부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소비자들은 집안 인테리어나 고급 가구와 어울리는 가전을 선호한다. 박지원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최근 이탈리아에서 열린 가구박람회에 다녀왔다. 이은주 디자이너는 “고급 종이의 재질을 강판 표면에 어떻게 구현할지 연구하기 위해 VIP용 초대장이나 청첩장을 버리지 않고 모으는 습관이 생겼다”며 웃었다.
○ 세계 곳곳을 누비는 디자인
이들이 디자인한 컬러강판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건축가 문훈 씨가 설계한 경기 성남시 판교의 땅콩주택, 클럽모우CC 회원을 위한 사교공간인 서울하우스 등 독특한 디자인이 적용된 건축물의 소재로 사용됐다. 러시아와 몽골의 부호들은 별장인 ‘다차’의 외벽재로 사용하기 위해 원목의 질감이 그대로 프린트된 강판을 유니온스틸에서 수입하고 있다.
국내 가전제품이 해외에서 고급 제품으로 인기를 얻다 보니 해외에서도 이들이 디자인한 강판이 들어간 가전제품이 팔리고 있다. 유난히 까다롭고 꼼꼼한 일본 가전회사의 기준을 통과해 미쓰비시에도 냉장고용 강판을 납품하고 있다. 박 디자이너는 “인도 소비자들은 원색의 화려한 꽃무늬를 선호하고 대형 냉장고 보급이 낮은 인도네시아는 부(富)를 과시할 수 있는 번쩍이는 소재를 좋아한다”며 “앞으로 더 다양한 디자인을 개발하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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