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을 충전하면 배터리 용량의 80%(약 14kWh)가 차서 140km를 달릴 수 있어요. 충전요금은 1kWh당 200원이니 2800원밖에 안 들죠.”
서울 종로구 서린동의 SK그룹 사옥. 강문수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본부 매니저는 사옥 한쪽에 설치한 급속충전기에서 케이블을 빼내 기아자동차가 최근 내놓은 순수 전기차 ‘레이EV’를 충전했다. 이 전기차에는 SK이노베이션이 개발한 16.4kWh 용량의 리튬이온폴리머 2차전지가 들어 있다. 강 매니저는 “언제든지 자동차회사들이 주문을 하면 맞춤형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2차전지 산업이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9월 연간 전기차 1만 대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2차전지 생산공장을 충남 서산일반산업단지에 준공했다. 연구개발(R&D)을 맡고 있는 대전 대덕연구소, 핵심부품소재를 생산하는 증평공장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 생산을 위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에 필요한 소형 2차전지에 집중하던 삼성SDI도 지난달 28일 이사회를 열어 독일 보쉬와 합작한 전기차용 배터리회사인 SB리모티브를 내년 1월 1일자로 흡수 합병하기로 했다. 보쉬와의 합작을 끝내고 독자적으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뜻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글로벌 자동차회사들과 접촉하며 2차전지의 공급처를 찾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생산하는 전기차 ‘볼트’에 2차전지를 공급하는 LG화학도 전기차 확대를 내건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승리로 힘을 얻고 있다. 세방전지, 아트라스BX, 벡셀, 누리플랜 등 중소·중견기업들도 최근 2차전지 시장에 뛰어들었다.
글로벌 2차전지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이미 파산한 미국의 에너1을 비롯해 최근에는 A123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최근 경영난에 허덕이던 일본의 소니가 2차전지 사업의 매각에 나서면서 2차전지 업계 2위인 파나소닉이 인수후보로 떠올랐다. ▼ 소형 IT기기용 전지는 정체… 산업용 ESS에 앞날 달렸다 ▼
중국에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투자한 BYD 등이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2차전지 산업의 ‘한중일’ 경쟁이 가시화한 것이다.
○ 공급 과잉에 ‘빨간불’
2차전지는 휴대전화와 태블릿PC 등 정보기술(IT) 기기, 친환경 발전설비에서 나온 전기를 저장하는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에 쓰인다. 문제는 전기차 시장이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당초
2015년까지 전기차 100만 대를 보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구매자들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했지만 판매량은 미미했다. 한국에서도
한때 기대를 모았던 저속형 전기차의 보급이 사실상 실패하면서 지지부진한 상태다. 당초 환경부는 2020년까지 100만 대의
전기차를 보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재 국내에 등록된 전기차는 500여 대에 불과하다.
높은 차량 가격과 충전
인프라의 미비 등이 가장 큰 이유지만 지난해 미국 도로교통안전국의 충돌 실험에서 GM의 전기차인 볼트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전황수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볼트 차량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 불거진 2차전지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도
전기차 확대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전기차 보급이 늦어지면서 2차전지 시장이 2년 안에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갈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나가키 사치야 일본 야노경제연구소 서울지사장은 최근 열린 ‘배터리 콘퍼런스 2012’에서
“전기차용 수요를 기대하고 과도하게 투자한 기업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가 문제”며 “배터리 생산능력은 수요를 초과한 상태여서
2년 이내에는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ESS 보급이 변수
2차전지 분야의 전문가들은
결국 전기차 보급과 ESS의 수요 증가속도가 산업의 기상도를 바꿀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시장조사기관인 IIT 역시 소형 IT
기기에 필요한 2차전지 시장은 2009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2% 성장에 그치는 반면 전기차와 ESS가 핵심인 중·대형
시장은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자동차업계는 긴 충전시간과 인프라의 미비, 비싼 차량가격으로 전기차가 수년
내에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최근 조재필 울산과학기술대 교수팀이 리튬 2차전지로 만든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1분
만에 충전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발표했지만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밖에 충전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 렌털 회사인
헤르츠는 무선으로 충전을 시도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배터리플레이스는 교환방식을 도입했지만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모델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일각에서는 현재 리튬을 활용하는 2차전지 시장이 현재 상용화를 준비하는 나트륨전지나 마그네슘전지, 금속과
공기 중의 산소를 이용하는 금속공기전지 등 차세대 전지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현재 리튬 중심의 2차전지
시장에서는 한국의 삼성SDI나 LG화학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장환 LG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한국기업들은 공정혁신을 통한
효율적 생산과 원가 경쟁력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기초 소재 기술이나 차세대 전지 역량이 부족해 시장 변화에 따른 대응이 늦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SS 시장의 성장 속도도 변수다. 전기차 확산이 늦어지더라도 태양광이나 풍력 등의 신재생에너지
수요가 늘면 여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ESS의 수요도 늘어나게 된다. ESS 사용의 확대는 공급 과잉
우려에 직면한 2차전지업계의 활로가 될 수 있다. 별도의 투자 없이도 전기차용 배터리를 ESS용으로 전환해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전지회사 관계자는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ESS 시범사업의 규모를 확대해 국내 기업들이 생산과 판매 실적을 쌓을 기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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