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시 ‘베인테 데 훌리오’ 버스터미널. 귀에 익은 ‘삑’ 소리를 내며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대고 들어선 아나 마리아 카스티조 씨(36·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하루 업무를 끝낸 뒤 광역버스(BRT)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라며 “보고타 시내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자가용으로 한 시간 넘게 걸리지만 버스전용차로 덕에 45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지선버스로 갈아타는 환승역에는 서울시내 대부분의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것과 비슷한 전광판이 눈에 띄었다. 전광판에는 다음 버스의 도착예정 시간을 알리는 문자정보가 안내되고 있었다. 서울 버스정류장에 서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인 이 교통카드시스템은 한국수출입은행이 금융 지원을 하고, LG CNS가 설치한 것으로 올 8월부터 가동됐다. 2004년 보고타 시의 버스전용차로제를 벤치마킹했던 한국이 8년이 지난 2012년 첨단교통 인프라를 역수출한 것이다.
○ 추진력으로 성공을 이끌다
“수출입은행이 없었다면 이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레카우도 보고타(RB)의 안드레스 주니가 최고재무책임자(CFO)는 금융기관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올해 초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RB는 LG CNS와 납품계약을 맺은 현지 사업자로 여러 주주들로 구성된 특수목적법인(SPC)이다.
당초 RB는 자국(自國) 은행들로부터 자금조달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은행들은 대출금리가 연 9∼10%대에 이르는 데다 1000억 원이 넘는 사업비를 10년 넘게 빌려줄 여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RB는 지난해 7월 LG CNS와 계약을 체결하고도 올해 초까지 금융기관을 구하지 못했고, 계약은 파기될 위기에 처했다. 발주처인 보고타 시 교통공사와 맺은 계약에 ‘올 3월까지 금융조달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조건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RB는 자국 은행과 거래를 포기하고, 수은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수은이 RB에 제시한 금리수준은 현지 은행의 절반 수준인 연 5%대였다. 주니가 CFO는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에서 수은의 자금력이나 집행속도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며 “수은의 낮은 조달금리 덕에 사업비를 아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수은은 보고타 교통카드시스템 사업을 진행하면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해외 PF 대출심사에 통상 2, 3년이 걸리는 전례를 깨고 불과 6개월 만에 자금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은은 부유층을 상대로 한 범죄 집단의 테러가 빈번해 실제 기업 소유주가 잘 드러나지 않는 콜롬비아의 비즈니스 환경에 애를 먹기도 했다. 이종현 수은 콜롬비아 사무소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주처인 RB의 주주 기업 관계자들을 일일이 접촉했다. 해당 기업의 실제 소유주가 누구이고, 자금력이 얼마나 되며, 현지 평판은 어떠한지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형사처럼 불시에 현지 기업 본사를 찾아가 정문을 나서는 직원들을 아무나 붙잡고 탐문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 신시장 개척자로 거듭나다
이번 사업은 수은이 국내 민간 상업은행인 신한, 우리은행을 함께 참여시켜 해외 PF에 동반 진출한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해외진출 경험이 별로 없는 국내 민간은행들은 그동안 채무불이행 등 사업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후진국에서 PF사업을 기피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은은 두 은행의 대출에 대해 보증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들의 대출기간을 사업초기 5년으로 한정해 부담을 줄여줬다. 이들이 5년간 자금을 회수한 이후에야 수은이 돈을 받는 구조다.
수은은 앞으로도 신시장 개척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톡톡히 해낼 방침이다. 최근 중동과 남미 등 신흥국들이 석유 등 광물자원을 내다판 수익을 바탕으로 플랜트, 도로, 항만, 발전소를 짓기 위한 대형 인프라 발주를 앞다퉈 쏟아내고 있어서다. 덩달아 PF 시장 규모도 2009년 1474억 달러(약 159조2000억 원)에서 지난해 2135억 달러로 45%가 커졌다.
게다가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PF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했던 유럽계 투자회사들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도 기회다. 한국 정부의 신용등급 상승으로 국내업체들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의 이자가 낮아진 점도 호재다.
실제로 성과도 좋은 편이다. 수은과 무역보험공사는 올 상반기(1∼6월)에만 총 49억2600만 달러의 PF를 일으켜 전 세계 수출신용기관(ECA)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일본 국제협력은행(JBIC) 및 일본 무역보험공사(NEXI)의 PF 지원액(20억1800만 달러)을 압도하는 규모다. 한국 금융기관들이 다크호스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용환 수출입은행장은 “앞으로 이머징 지역을 중심으로 해외 PF 시장이 지속적으로 커지는 만큼 국책은행과 민간은행이 힘을 합쳐 해외진출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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