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퍼스의 낭만 대신 꿈을 향해 달린 10대 고등학생들이 있다. 인문계고에 가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마이스터고에 진학해 최선을
다한 끝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연구조원이 된 남학생들, ‘스펙’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창의성 하나로 광고회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예비 광고인’이 된 여고생. 당찬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입사… 마이스터고 1기 김진현-노치훈-윤왕호 군
“캠퍼스의 낭만, 솔직히 부럽죠. 대학에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런데 인문계 고교를 나와 대학 가는 친구들은 오히려 저를 부러워하더라고요.”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윤왕호 군(18)은 ‘대학에 가지 않은 게 후회되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년 2월 부산기계공고 졸업 예정인 그는 10월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인 한국생산기술연구원(생기원)에 취업해 경남 진주시 생기원 뿌리산업기술혁신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생기원에는 윤 군 같은 ‘고졸 예정자 연구인력’이 2명 더 있다. 모두 마이스터고 1기 출신이다. 취업 전선에서 마이스터고 출신들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생산직이 아닌 연구직 일자리를 얻은 것은 이례적이다.
○ 마이스터고 진학 택한 전교 회장
생기원은 마이스터고 출신 채용을 올해 3명에서 내년 6명, 2014년에는 9명으로 늘릴 예정이다. 유윤형 생기원 팀장은 “합격자 외에도 마이스터고 출신 지원자들은 소신이 뚜렷해 면접관들이 크게 놀랐다”고 전했다.
마이스터고 출신 지원자들은 2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도 ‘남들과 다른 길’을 두 번이나 택했다. 마이스터고에 진학할 때 주변의 만류가 심했고, 생기원 취직 때도 ‘박사급 연구원이 많은 연구소에서 조원(助員) 신분으로 일하는 게 바람직할까’라는 회의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교 회장이었던 윤 군도 그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빨리 사회에 진출하고 싶다, 마이스터고에 가겠다”고 하자 교장선생님까지 나서 일주일이나 그를 말렸다. 그는 “‘3년 뒤 내 모습을 봐 달라’고 큰소리쳤는데 잘 해낸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윤 군과 같이 생기원에 취업해 경기지역본부 실용로봇연구그룹에서 일하는 김진현 군은 인문계 고교를 7개월가량 다니다 ‘내 길이 아니다’ 싶어 자퇴하고 원주의료고에 입학해 전산응용기계제도기능사, 공유압기능사, 컴퓨터응용밀링기능사 등 자격증을 취득했다. 호남권지역본부 그린몰딩센터에 배정받은 노치훈 군은 “군산기계공고 입학 때 ‘여기엔 꿈이 있다고 해서 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며 “이제 그 꿈을 이룰 차례”라고 말했다.
○ “꿈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 왔다”
1994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은 모두 “지금은 연구를 돕는 역할이지만 언젠가는 연구책임자가 되고 싶다”며 낮에는 실무를 배우고 밤에는 대학에서 이론을 배우길 희망했다. 종종 새벽까지 실험을 한다는 김 군은 “로봇 분야가 흥미롭고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 같다”며 “지금은 유압(油壓) 분야를 공부하지만 전기·전자·소프트웨어 분야까지 익혀 통합적인 로봇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 광고회사 이노션 월드와이드에 발탁… 대구 구남보건고 2학년 배혜진 양 ▼
“볼펜 광고를 만들고 싶어요. 광고 카피는 ‘잘 쓰십시오’.”
대구 구남보건고 2학년 배혜진 양(17)에게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광고를 만든다면 어떤 소재를 택하고 싶은지 묻자 대뜸 ‘볼펜’이라는 답이 왔다. 배 양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글을 쓸 때 잉크가 잘 뭉쳐지지 않으면서 기능에 충실한 좋은 볼펜은 찾기 어렵다”며 “수많은 볼펜 중에서 자신을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 양은 예비 광고인이다. 졸업 후 광고회사인 이노션 월드와이드 취업이
결정됐다. 제작부서의 크리에이터로 아트디렉터나 카피라이터의 길을 갈 예정이다. 대학 졸업장 없이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 크리에이터가 되는 첫 사례다. 한 방송사 취업 프로그램에 도전한 배 양을 보고 이노션이 적극적으로 채용하겠다고
나선 게 계기가 됐다.
○ “스펙에 집착하면 꿈을 잊게 된다”
“어릴 때부터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좋아하질 않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 눈에 들어왔던 게 광고예요.”
TV를 끄고 나서도 광고 생각이 났다. 저런 소재는 이렇게 만드는 게 좋을 텐데 싶은 게 많았다. ‘내가 만든다면’ 하고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 광고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하지만 대기업 계열사가 주류를 차지하는 국내 광고회사는 명문대 출신들도 취업의 높은 벽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애초 신입사원 전형 조건에 ‘대졸’이 명시돼 있다.
배 양은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가정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애니메이션과를 찾아 특성화고인
대구 구남보건고에 입학했다. 광고인을 꿈꿀 때 주변에서는 ‘스펙’ 때문에 안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배 양은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스펙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까봐 정신을 다잡고 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폭넓은 안목을 키우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남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연습도 했다. 국가공인 디자인기술자격증(GTQ) 2급을 따고, 국세청 등 여러 기관이 주최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 “꿈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노션 월드와이드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고졸 사원을 채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엉뚱한 상상력’이 조직에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진형 인사팀장은 “학력이나 일반적인 스펙보다는 개인의 역량과 발전 가능성을 보고, 창의적 인재를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심사를 위해 배 양을 비롯한 광고인을 꿈꾸는 수많은 고등학생을 만난 이노션의
심사위원들은 학생들의 진지함과 실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혜진 이노션 월드와이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대학 진학과 취업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내린 결론에 용기 있게 달려가는 모습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웠다”며 “꿈은 사람을 참 부지런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배 양은 이달 말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선배 멘토’를 지정받아 앞으로 1년간 입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배 양은 “자신의 주장만 강요하기보다 공감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광고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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