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세계 일류]<1> 꽃샘식품 꿀유자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4일 03시 00분


길에서 배운 경영… ‘진심’ 하나로 세계 1위

지난해 12월 27일 꽃샘식품 꿀유자차 생산라인 앞에서 이상갑 회장이 제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포천=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지난해 12월 27일 꽃샘식품 꿀유자차 생산라인 앞에서 이상갑 회장이 제품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포천=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1963년 2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서울역 역사(驛舍)는 그때도 이미 낡은 건물이었다. 그 낡은 건물에서 꾀죄죄한 몰골의 13세 소년이 두리번거리며 걸어 나온다. 완행열차에 14시간이나 몸을 맡겼던 터라 움직임이 뻣뻣하다.

아니, 뻣뻣한 자세는 몸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 보는 도시 풍경에 놀란 탓이다. 고향인 전북 임실군 삼계면은 그로부터 10년 뒤 전기가 들어왔다. 집을 뛰쳐나오면서 가져온 아버지 돈 250원 중 기차 삯으로 60원을 썼다. 이제 190원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전 국민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한동안 굶어야겠다’고 다짐한다.

○ 250원 들고 무작정 서울 올라와

“그때 얘기를 그렇게 자세히 쓰셔야 하나요?” 반(半)세기가 훌쩍 지난 2012년 12월. 경기 포천시 소흘읍, 공장과 같은 건물에 있는 본사 사무실에서 구수한 인상의 회장님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국내 꿀차 업계 1위, 꿀유자차 세계시장 점유율 1위(15.8%)인 꽃샘식품의 이상갑 대표이사 회장(63). 최종 학력은 여전히 ‘국졸(國卒)’이다.

무작정 상경한 소년에게 5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에게 처음부터 최고경영자(CEO)의 소질이 있었던 것일까, 어떤 특출한 경험들이 그를 CEO로 만든 걸까, 그도 아니면 그저 때를 잘 만난 풍운아(風雲兒)?

이 회장도 한마디로 정리하진 못했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미래를 개척하고 싶다는 생각은 상경 전부터 있었다. 거기에 무학(無學)의 통찰을 더하면서 “기업은 무한한 도전”이라는 단단한 기업가정신이 만들어진 듯했다.

시골 소년은 서울역 대합실 맨바닥에서 자고 세수도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구걸도 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보이는 게 없어집니다. 당시 경험이 제 삶의 기반입니다.” 어지간한 일로는 낙담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이불 실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말이 취직이지 명절에 작업복 사주고 고향 갈 차비 주는 것 말고는 월급이 ‘0원’이었다.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으로 감지덕지했다. 실밥과 먼지가 가득한 3, 4평짜리 공간에서 직원 5명이 하루 15시간 일했다. 여유가 생기면 2원50전짜리 전차를 타고 시내구경을 다녔다. 그날 보고 느낀 것을 매일 수첩에 적었다.

○ 길에서 먹고 자며 경영을 배우다

1965년. 15세 때 기술공이 됐고, 적지만 저축도 할 만큼 월급을 받았다. 그런데 피 섞인 기침이 자주 났다. 폐결핵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고향에 내려갔다. 어머니는 “부모 말 안 들어 죽을 병 걸린 거 아니냐”며 눈물을 흘렸다.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밥값을 벌어야 했다. 양봉농가에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주인, 선배 한 명, 그리고 아직 10대인 그. 이렇게 셋이서 벌통 70통을 들고 꽃을 따라다녔다. 2월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시작해 아카시아꽃을 따라 전남으로, 또 강원으로…. 1년에 열서너 번 이동했다. 벌통 옆에 천막을 치고 잤다. 벌을 친다는 일은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쉬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일벌의 모습에 묘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꿀을 상복하자 폐결핵이 거짓말처럼 완치됐다. ‘내 평생 직업을 이걸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1968년, 18세. 혼자 해도 되겠다 싶어 독립했다. 주인은 퇴직금으로 벌통 5개를 줬다. 그동안 모은 돈과 아버지에게 빌린 돈을 보태 벌통 35개를 더 샀고, 1년 만에 이걸 80개로 불렸다. ‘별거 아니다’ 싶었는데 첫 사업은 곧 망해버렸다. 판로가 막혔고, 그나마 판 것도 유통업자들에게 몇 번 돈을 떼여 다시 양봉농가 종업원으로 전락했다.

돈 벌면 독립하고, 다시 망해 또 종업원으로 일하고, 독립하고, 그러길 세 차례 반복했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와 지낼 수 있는 계절은 겨울뿐이었다. 그러면서 ‘사업을 하려면 기술만으론 부족하다, 유통과 판매도 알아야 하고 자금 회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에서 많은 걸 배웠다. 서울역 길거리에서 근성을, 야산 꽃밭 옆 시골길에서 경영을 배웠다. 1973년, 네 번째로 독립한 뒤로는 망하지 않았다.

○ 한 걸음 더 앞서는 게 성공 실마리

양봉농가도 기업가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짜 벌꿀이 문제돼 업계 전체가 피해를 보자 아예 동료들을 규합해 양봉협회를 설립했다. 1977년 일이다. 협회에 벌꿀검사실을 만들어 정품을 인증해줬다. 이때쯤엔 벌통이 200개로 늘어났다.

1980년대.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벌통이 700개를 넘어서자 종업원을 10여 명 뒀다. 그런데 사람들은 꿀을 예전처럼 많이 먹지 않았다. 어디에든 꿀을 팔아야 하는데…. 제약회사를 찾아다니며 “꿀을 이용한 건강음료를 개발하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로얄D’, ‘구론산’, ‘코카스’ 같은 음료가 나왔다. 1990년대에는 도매시장에 뛰어들어 자체적으로 꿀을 포장하고 백화점에 납품했다.

지긋지긋한 위기는 또 찾아왔다. 외환위기 때 대형 유통업체들의 부도로 큰 피해를 보았고, 꿀 건강음료도 인기가 시들해졌다. 이번에는 유자차의 설탕을 줄이고 대신 꿀을 넣은 꿀유자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비자 조사를 해보니 유자차도 꿀처럼 가짜가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귤이나 오렌지가 아닌 진짜 유자를 사용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유자를 얇게 썰어 껍질과 과육을 보여주면 어떨까?’

시제품을 만들어보니 향이 뛰어났고 씹는 촉감도 좋았다. 하지만 상품화는 만만치 않았다. 방부제를 쓰지 않고 멸균하는 과정에서 껍질의 색이 변했고 병뚜껑이 잘 잠기지 않거나 산(酸) 성분 때문에 병이 터지기도 했다. 수억 원을 들여 개발한 설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고물상에 팔아치운 적도 많았다. 개발하고, 버리고…. 그러기를 대여섯 번 되풀이하고서야 해결책을 찾았다. 나중에 꿀유자차가 대박을 터뜨리자 뒤늦게 뒤따라오려던 대기업들도 설비 때문에 포기하는 것을 보고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고 자위했다.

○ 반도체 공장처럼 관리하는 생산라인

‘따다다다닥!’

지난해 12월 27일 꽃샘식품 공장 1층 꿀유자차 생산라인의 충진(充塡)실. 원료 주입기 아래 멈춰선 유리병들은 경쾌한 소리를 냈다.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유리병 6개씩을 톱니 모양의 기계가 붙들 때 병끼리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다. 꿀과 유자 슬라이스, 물이 섞인 섭씨 80도의 배합액을 병에 채우는 데는 1초도 안 걸렸다. 그렇게 6개의 병에 먹음직스러운 노란 액체가 차면 다음 6병이 또다시 ‘따다다다닥!’ 소리를 내며 주입기 아래 멈춰 선다.

한 번에 6병씩, 1분에 12번을 처리하니까 분당 72병을 채운다. 이 상태에서는 유자차 배합액이 끈적이지 않고 물처럼 출렁인다. 다음 단계인 냉각 수조에서 병을 천천히 굴리면서 식히는 동안 내용물에 점성이 생긴다.

대부분 검수 인력인 공장 근무자들은 위생복과 위생두건, 마스크를 쓰고 덧신을 신고 있었다. 견학 온 사람도 같은 복장을 하고 알코올로 손을 씻은 뒤 에어샤워를 해야 공장에 들어갈 수 있다. 액상 원료를 만드는 배합실은 아예 통제구역이다. 이희성 해외사업부 팀장은 “국내에 유자차 제조회사는 27곳 정도 있지만 우리처럼 자동화 설비를 갖추고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곳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도 “영업을 입으로 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단 500만 원어치를 사더라도 구매자들은 공장과 관리시스템을 직접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국내외 바이어들은 공장을 둘러보고 꽃샘식품의 팬이 됐다. 중국 월마트 실사단은 100점 만점에 98점을 주며 “중국에선 나올 수 없는 점수”라고 했다. 꿀이 특산물인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셴코 당시 대통령은 2006년 방한해 꽃샘식품 공장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 회장은 얼마 뒤 유셴코 대통령의 초청으로 우크라이나에 가서 기술을 전수해줬다.

○ “1회용 제품으로 새 시장 열겠다”

꿀유자차의 대성공 뒤 이 회장은 꿀대추차, 꿀생강차, 꿀레몬차, 꿀삼차로 상품군을 넓혔다. 지난해에는 꿀도라지차, 꿀블루베리차, 꿀크랜베리차를 새로 내놓았다.

내수시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라 매년 10여 차례 해외 유명 식품박람회에 나가 바이어를 구했다. 맛이나 향에 대해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지만 설탕에 거부감이 심한 유럽 소비
자를 위해 꿀 함량을 높인 제품을 개발했다. 지금은 과당을 쓰는 무설탕제품을 연구하고 있다. ‘차를 즐기는 10억 인구’에 매료돼 중국에 진출했다가 현지 외상거래 관행 때문에 골탕을 먹는 아픔도 겪었다.

지난해에는 일본 중국 대만 러시아 캐나다 미국 등 22개국에 제품을 수출해 270억 원 매출 가운데 85억 원(800만 달러)을 나라 밖에서 벌어들였다. 올해는 1000만 달러 수출이 목표다.

꽃샘식품의 최근 야심작은 1회용 제품이다. 휴대성이 떨어지고 뚜껑과 병이 달라붙거나 내용물이 잘 굳는 병 제품의 불편을 해소했다. 회사 관계자는 “해외 바이어들이 1회용 제품에 관심이 많다”며 “외국 항공사에 기내용으로 납품하는 계약이 거의 성사 단계”라고 귀띔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도 꿀과 차에 집중할 계획이다. “다른 분야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여름에도 잘 팔리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다음 목표다. 개인적인 숙원은 따로 있다. 장학재단을 세워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이 없게 하는 일이다.

포천=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꽃샘식품#유자차#이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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