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모터스포츠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모나코 북부 몬테카를로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열리는 ‘2013 월드랠리챔피언십(WRC)’이 그 시발점이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매년 최대 1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또 유럽에 마련한 전초기지에서 경기용 차량 개발의 막바지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목표는 3년 안에 정상권에 진입해 현대차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다. 레이싱대회 참가를 통해 얻은 기술을 신차에 반영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산 슈퍼카’ 제작에 활용하는 것도 중장기 계획에 들어 있다. 대기업의 모터스포츠 참가와 고성능의 슈퍼카 개발 모두 한국 자동차업계가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숙원이다. ○ 개조차 통해 ‘실전 기술’ 얻어
“2013년 WRC에서 만납시다.”
지난해 9월 프랑스 파리모터쇼가 열린 포르트 드 베르사유 박람회장. 현대차의 선언과 함께 소형차 ‘i20’을 기반으로 개발한 랠리카(양산차를 경주용으로 개조한 차)가 강렬한 엔진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튀어나왔다. 현대차는 세계 주요 레이싱대회를 주관하는 국제자동차연맹(FIA) 본부의 소재지인 파리 한복판에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발표 후 4개월 가까이 지난 이달 9일, 현대차 WRC 총괄운영팀장인 최규헌 이사(47)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얼마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레이싱팀 전담조직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경기 준비에 나섰다”고 말했다. 레이싱 전담조직은 현재 한국의 현대차 남양연구소와 연계해 모터쇼에서 공개한 i20 랠리카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대차는 이르면 이달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 인선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현대차의 이번 행보는 ‘본격적인’ 모터스포츠 대회 참가를 뜻한다. 이전에도 WRC에 출전한 적이 있지만, 본사 차원의 대규모 투자와 차량 개발, 팀 운영이 이뤄지는 ‘워크스(works)’ 형태는 이번이 처음이다. 2002년 WRC에서 현대차 유럽법인이 영국 차량개조업체와 함께 만든 ‘베르나’ 개조차량이 종합 4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본사의 지원 부족으로 이듬해 철수하고 말았다.
현대차가 WRC 출전을 결정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 제고와 실제 차량 제작에 사용되는 기술 확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다. 최 이사는 “본격적인 모터스포츠 참가를 통해 고성능 차량 개발에 필요한 중요 기술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스바루 ‘임프레자 WRX STI’와 BMW ‘미니 JCW’, 시트로엥 ‘DS3 레이싱’ 등이 WRC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인 고성능 차량이다. ▼ “폴스크바겐 경주車 반드시 추월” ▼
WRC 출전은 비용 측면에서도 다른 대회에 비해 유리하다. 경주 전용차를 이용하는 포뮬러원(F1) 출전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A급 레이서의 연봉만 해도 수천만 달러에 이른다. 반면 WRC는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양산차량을 개조해 사용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든다. 현대차의 연간 WRC 투자 예산은 약 6000만∼7000만 유로(약 840억∼98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F1에 비해 적지만 현대차의 모터스포츠 부문 투자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현대차의 모터스포츠 본격 진출 결정은 “모터스포츠 분야를 강화하라”는 정의선 부회장의 지시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차는 그동안
모터스포츠 사업에 꾸준히 관심을 보여 왔으나 “비용 대비 효과가 떨어진다”는 재무 관련 부서의 반대에 번번이 부딪쳤다.
최 이사는 “최근 사내에 ‘이제는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모터스포츠와 고성능 차량에 대한 활발한 활동과 투자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해 총 13경기를 치르는 WRC의 첫 레이스는 15일(현지 시간) 몬테카를로에서 열린다. 현대차는 올 시즌 하반기부터 부분
참가를 통해 경험을 쌓고 내년부터 전 경기에 출전해 입상을 노릴 계획이다. 2015년부터는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정상에 오르는 게
목표다. WRC에서는 지난해까지 9년간 시트로엥이 프랑스의 세계적인 랠리 드라이버 세바스티앙 로브를 앞세워 우승을 휩쓸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경쟁 구도에 변화가 예상된다. 로브가 올 시즌부터 일부 경기만 참가하기로 결정한 데다 강력한 경쟁자 폴크스바겐이
신형 랠리카를 선보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차까지 가세하면 흥미진진한 레이스가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지난해 기준 생산·판매량 세계 5위(712만 대·기아차 포함)에 오르며 세계적 자동차 제조사 반열에 올랐다. 미국 유럽
등 선진시장의 경기침체와 신흥시장의 급격한 신차 수요 증가는 ‘저렴한 가격의 좋은 차’를 주로 만드는 현대차에는 큰 호재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히려 성장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게 현대차 경영진의 우려였다.
현대차 경영진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자동차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브랜드 이미지 개선과 기술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본격적인
모터스포츠 대회 참가와 고성능 자동차의 개발 배경이 됐다. 세계 최고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은 자동차회사가 ‘진정한
최고’로 인정받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모터스포츠는 당연히 자동차업체들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하다. WRC처럼
순수 경주용 차가 아닌 일반 양산차를 기반으로 경기에 나서는 경우 더욱 그렇다. 공교롭게도 WRC에서 현대차의 강력한 경쟁상대 중
하나는 실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 폴크스바겐이다. 폴크스바겐은 i20의 경쟁모델인 소형차
‘폴로’를 개조한 경주차로 출전한다.
실제 광고효과나 소비자의 브랜드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은 “현대차가 WRC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둔다면 투자금액 이상의 높은 광고효과는
물론이고 자동차 명가로서의 명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현대차를 제외한 주요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은 빠짐없이 세계적인 레이싱대회에 참가해 성과를 거둔 경험을 갖고 있다. 현대차의 선전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월드랠리챔피언십(WRC) ::
국제자동차연맹(FIA)이 주관하는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원(F1)과 함께 최정상급 자동차 레이스로 꼽힌다. 1973년 첫 대회가 열렸으며 올해 40주년을 맞는다. 서킷 위를 달리는 일반 레이싱대회와 달리 산악지대와 숲길, 빙판 등 험로가 주행코스에 포함돼 박진감 넘치는 경기로 인기가 높다. 폴크스바겐, PSA푸조시트로엥, 포드 등 세계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이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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