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고향마을 근처 읍내에는 오일장이 섰다. 장날이면 어머니는 장에 이고 갈 광주리를 가득 채우느라 새벽부터 분주하셨다. 해질녘이면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의 광주리에는 생선이나 고기, 간혹 운이 좋으면 전병(‘센베과자’라고 불렸던)이나 눈깔사탕이 들어 있었다.
대구에 유학하던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대구역 근처의 번개시장을 찾았다. 시장 여기저기서 흥정을 벌이는 ‘아지매’(아주머니의 사투리) 가운데, ‘혹시 어머니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곤 하였다. 늘 낙담할 수밖에 없었지만 시장을 다녀온 날이면 어머님을 뵙고 온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대학생 때도 시장을 자주 찾았다. 서울 비원 돌담길과 원남동을 지나 종로4가와 종로5가 샛길에 들어서면 주변을 압도하는 ‘광장시장’이 있었다. 시장 골목을 기웃거리며 배가 고프면 국수 한 그릇 사 먹고, 멸치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걸치곤 했다. 시장은 내게 단순히 상거래가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 삶이 생동하고 상처가 아무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고향이 그리울 때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시장을 찾았다.
이 책 ‘광장시장 이야기’는 오래전 내가 위로의 공간으로 삼았던 광장시장 100년사를 소설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 쓴 이야기집이다. 지금이야 옛 명성만 못하지만, 한때 광장시장은 조선 팔도의 모든 물산이 모일 정도로 으뜸가는 시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상인들은 이곳을 차지하려 부단히 꾀를 부렸지만, 번번이 허사에 그쳤을 정도로 광장시장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담긴 곳이다.
이 책은 질곡의 세월을 개척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광장시장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주먹들’, ‘꿀꿀이죽’으로 허기를 달래며 거상이 된 실향민도 있다. 남다른 ‘영업 마인드’로 승승장구한 상인도 있지만, 성공과 실패의 경계를 넘나든 상인도 있다. 은행원의 꿈을 실현한 여자 농구 선수, 장바구니를 허리춤에 차고 카바레를 드나들던 아줌마들, ‘제비’가 아닌 ‘춤꾼’의 꿈을 실현한 사나이, 시장에서 사랑을 키워 온 부부, 가업을 승계한 부자와 모녀, 광장시장이 좋아서 가게를 차린 당찬 젊은이 등 서민들의 소박한 삶이 줄줄이 사탕처럼 등장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오는 서민들의 애환을 엿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광장시장은 서민의 삶이 켜켜이 쌓인 커다란 곳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문득 이런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아, 광장시장에서 소주 한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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