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북동쪽으로 3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크라체 주(州) 삼보 지역. 자동차가 시속 60km 이상 속도를 낼 수 없는 울퉁불퉁한 길을 4시간 넘게 달리고, 메콩 강을 배로 건넌 후 차로 30여 분을 더 들어가야 닿는 오지다.
이곳에선 한국 기업의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한화 무역부문은 서울 여의도 면적(약 2.9km2)의 120배에 이르는 약 3만4000ha의 밀림에 도로와 사무실, 관개수로를 건설 중이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조림사업을 위해서다. ㈜한화는 밀림의 잡목을 베어낸 뒤 값이 비싼 개량종 아카시아를 심어 가꿀 예정이다.
김황철 ㈜한화 상무는 2011년 9월 캄보디아로 와서 조림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초기엔 사업장으로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 지역은 개발이 어려워 캄보디아 정부조차 20여 년 동안 그냥 내버려 뒀던 곳입니다. 처음엔 한국인은 물론이고 캄보디아 현지 직원까지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그럼에도 ㈜한화는 삼보 지역에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의 조림사업은 전망이 밝기 때문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북동부의 캄보디아는 최근 세계적인 임업과 식량, 제조업 기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국토의 75%가 평지로 농업에 유리한 데다 인건비가 싸 중국, 베트남의 임금 상승에 부담을 느낀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이곳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킬링필드의 대학살과 연이은 전쟁을 거쳐 총성이 멈춘 지 15년,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대규모 농업 메카로
“우기(雨期) 때면 지평선까지 펼쳐진 저 논밭이 누런 황토색 강물로 뒤덮였었지요.”
1일 오후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농장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차이 타웅 씨가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에는 산이 별로 없어 대규모 농업을 하기 좋지만 예전에는 관개시설이 적어 비만 오면 피해가 컸다”며 “요즘에는 인프라가 급속히 확충되면서 대규모 농장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 됐다”고 말했다.
프놈펜 북쪽 캄퐁톰에서 고무농장을 운영하는 백병근 BNA 사장도 농업 분야의 전망을 밝게 본다. 백 사장은 2009년 9월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1만 ha의 땅을 빌려 3년째 고무나무를 심고 있다. 최근 신흥국의 자동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덩달아 타이어 수요가 늘었고, 원재료인 천연고무 가격은 한때 t당 5000달러(약 530만 원)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농장 경영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 20여 팀이 우리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캄보디아에서 농사를 짓는 한국인들이 캄보디아농산업협회를 창립하기도 했지요.”
무학 계열의 MH바이오는 고구마와 비슷한 카사바로 바이오에탄올을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다. 자본금이 3000만 달러(약 318억 원)인 이 업체는 인근 지역 농민들이 재배한 카사바를 사서 바이오에탄올로 만든 후 유럽에 수출한다. 충남농업개발도 2008년 12월 캄보디아 캄퐁스페우 주 위윌톤 지역에 농업회사를 설립한 뒤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다. 이광호 KOTRA 프놈펜무역관장은 “캄보디아에서 대규모 농업 생산이 늘고 있지만 이를 저장하고 가공하는 분야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며 “한국 기업들이 직접 농업에 뛰어들지 않고 유통 분야에만 진출해도 좋은 사업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탈(脫)중국 영향도
한국 제조업체들의 진출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기업은 경안전선이 설립한 KTC. 이 회사는 프놈펜에 자본금 2000만 달러를 투자해 공장을 짓고 전력 및 통신용 케이블을 생산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전력 및 통신 사정이 당장은 열악하지만 경제가 발전하면 반드시 성장할 것이란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무역관장은 “KTC는 전선회사로 시작해 현재 레저 및 수력발전 분야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어 캄보디아인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으로 인식할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의 제조기업들도 최근 캄보디아를 새로운 제조업 기지 후보로 주목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과 베트남의 임금 수준이 가파르게 오른 영향이다. 캄보디아 공장 노동자의 월 급여는 100달러 전후로 중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미얀마, 라오스와 함께 최빈국으로 분류돼 해외로 상품을 수출할 때 관세를 거의 내지 않아도 된다. 미국 달러가 현지 화폐인 리엘을 사실상 대신하고 있어 환차손 위험이 없는 점도 투자자 입장에선 매력적이다. 이런 요인들의 영향으로 캄보디아의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액은 2011년 8억5000만 달러(약 9010억 원)에서 지난해 15억 달러(약 1조5900억 원)로 급증했다.
신한은행의 캄보디아 현지법인 신한크메르는 캄보디아 경제에 돈이 돌기 시작하면서 점차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고객의 90%가 현지인인 이 은행은 지난해 12월 21일 프놈펜 외곽의 테우크틀라 지역에 3호점을 열었다. 이재준 신한크메르 행장은 “은행 이용이 익숙하지 않았던 현지인들이 고금리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집 안에 숨겨뒀던 이른바 ‘매트리스 머니’를 들고 나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정부 차원 부패방지위원회 출범
캄보디아 역시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처럼 사업 절차가 복잡하고 각종 인허가를 받을 때 정부 고위관료들과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캄보디아 정부는 부패방지위원회를 출범시켜 공무원들의 뒷돈 거래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현지 교민신문 ‘뉴스브리핑’의 정지대 사장은 “불확실성이 크면 투자를 하지 않는 일본 기업들이 최근 적극적으로 주머니를 여는 것만 봐도 캄보디아의 사업 환경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진출한 국내 업체들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사업을 하려면 문서 형식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업 인허가 서류를 만들어 현지 공무원들에게 제출할 때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체 사장은 “같은 일을 수십 년간 하는 공무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서류상의 작은 흠도 문제로 지적하면서 시간을 끄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 프놈펜 곳곳에 짓다 만 건물… 한국 부동산투자 실패의 잔해 ▼
■ 투기열풍 불 지피다 글로벌 금융위기 후 올스톱
2일 오후 캄보디아 프놈펜의 오피스 타운인 모니봉 지역을 찾았다. 초고층 건물인 ‘골든타워42’가 뼈대를 드러낸 채 시내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한투자신탁과 부동산개발회사 연우가 ‘캄보디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목표로 짓다가 사업비를 감당하지 못해 2010년 9월 공사를 중단한 건물이다.
건물이 들어선 땅은 프놈펜의 랜드마크였던 독립기념비와 유서 깊은 공공병원이 있던 곳이다. 당시 훈 센 총리가 경제 성장을 자랑하는 건물을 짓기 위해 한국 기업에 특혜를 줬다는 잡음이 나돌기도 했다.
한 캄보디아 교민은 “골든타워42는 한국 기업이 무리하게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이미 분양을 받은 현지 투자자들이 신문에 항의 광고를 내는 바람에 캄보디아 정부도 속앓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모니봉 지역을 포함한 시아누크 도로 주변 땅들은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다. 3.3m²(1평)당 호가가 1000만 원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프놈펜 시내 부동산 투기 열풍에 불을 지핀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한국 기업들이었다.
2000년대 중반 부산저축은행은 프놈펜 북서부 신도시인 캠코시티 건설과 함께 시엠레아프 신공항과 프놈펜 주변 고속도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캠코시티의 일부 아파트를 준공한 것 이외 다른 사업에서는 모두 철수했다. 이광호 프놈펜무역관장은 “부산저축은행이 캄보디아 부동산 개발에 모두 5000억 원을 투자했다고 발표했지만 현지인의 명의로 땅을 산 데다 거래 과정이 불투명해 실제 투자금액은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GS건설과 포스코건설 역시 메콩 강 주변의 땅을 사들여 초고층 오피스타운이나 주상복합 건설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닥치자 중국이나 일본 기업에 땅을 팔고 사업을 접었다. 정지대 뉴스브리핑 사장은 “캄보디아 경제가 다시 주목받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로부터 싸게 땅을 산 일본과 중국 기업들만 부동산 개발에 나서고 있다”며 “정작 한국 기업들은 과거 투자 실패에 따른 악몽으로 주춤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정확한 분석과 꼼꼼한 준비 없이 이뤄진 해외 진출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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