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직원 A 씨(29)는 대리 승진시험을 앞두고 한 달 내내 고3 수험생처럼 살았다. 평일에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주경야독’했고 주말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도서관에 갔다. 폐관 시간까지 회사 동기들과 업무 관련 교재를 펼친 채 ‘승진 스터디’에 열을 올렸다.
SK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B 씨(31·여)는 지난해 승진시험을 앞두고 이틀 휴가를 내 막판 ‘초치기’를 했다. 그는 “승진 대상자 대부분이 시험을 앞두고 주말에 하루 이틀 휴가를 내고 대대로 내려오는 ‘기출문제 족보’를 달달 외운다”고 했다.
○ ‘승진 고시’ 시대
경제의 저성장 구조가 고착되고 불황이 길어지면서 대기업 승진의 벽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매년 신입사원은 새로 뽑아야 하는데 기업 자체가 성장하지 못하다 보니 기존 직원들을 승진시킬 자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인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 10곳 중 7곳(69.4%)은 진급 대상자 가운데 실제로 진급한 비율이 절반에 못 미쳤다고 응답했다. 승진 대상자 중 10% 미만을 진급시킨 회사가 20.4%, 10∼20% 진급시킨 회사가 19.4%, 20∼30% 진급시킨 회사가 13.0%였다.
기업들은 점점 승진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거나 승진자격을 강화해 승진 대상을 최대한 줄이는 추세다. 승진을 위해 제출해야 하는 어학점수 기준도 강화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올해부터 생산 및 영업직군에도 ‘토익스피킹 5급, 오픽(OPIc) IL’의 어학점수를 받기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 “이제까지 생산영업직군은 영어점수가 없어도 승진할 수 있었지만 이젠 예외를 없앤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코오롱도 지난해부터 과장급 이상 승진 대상자에게 ‘오픽 IM’ 이상의 자격기준을 요구하기로 했다.
○ “신입사원 때부터 승진 공부”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하듯 신입사원 때부터 미리 승진공부를 하는 신참들도 있다. CJ제일제당 입사 3년차인 C 씨(27)는 “영어시험 점수가 강화되면서 사내 분위기가 살벌해졌다”며 “아직 승진시험을 보기까지 몇 년 남았지만 주말에 대학 도서관에 가 영어공부를 하고 평일엔 회사 동기 3명이 모여 영어회화 스터디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인사 관행을 고치는 기업이 늘면서 ‘짬’이 차면 자동으로 승진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사라졌다. LG전자는 4년 연한을 채우면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직급을 자동으로 올려주던 관행을 2009년 이후 폐지했다. 대리와 과장 승진 연한도 기존 3년에서 4년으로 각각 1년씩 늘렸다.
2011년 ‘팀장 자격시험’을 도입한 롯데그룹은 계열사 팀장급 직원과 팀장 승진 대상자를 10주 동안 매주 토요일 경기 용인과 서울 마포의 교육장으로 데려가 8시간씩 교육시킨다. 교육이 끝나면 서술형으로 답하는 종합평가를 실시하는데 많게는 20%가 불합격 판정을 받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한 계열사 팀장은 “현장 근무가 많아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특정 계열사 사람들이 경쟁자로 오면 환호하고, 석·박사 출신이 많은 계열사와 함께 하면 한숨을 쉴 정도”라고 전했다.
KCC는 과장과 차장 승진 대상자 전원에게 논문 제출을 요구한다. 석·박사 출신 연구원뿐 아니라 마케팅 등 일반 부서 직원까지도 업무 영역 관련 주제를 잡아 논문을 써야 한다. 회사 관계자는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주석과 참고문헌 등도 첨부하는 실제 논문 수준을 요구한다”며 “대부분 승진 10개월 전부터 논문 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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