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김홍범 씨(35)가 이끄는 패션 브랜드 ‘크레스에딤’의 스튜디오는 서울 중구 신당동 주택가 골목 안쪽에 있다. 지난달 15일 어렵사리 찾은 사무실에는 나란히 내걸린 ‘신상(신제품)’들과 90%까지 할인 판매하는 철 지난 샘플들이 한 공간에 공존했다. 중견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에 비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크레스에딤’으로서는 한 단계 성장한 결과물이 이 스튜디오다.
○ 뉴욕의 샛별로 뜨다
김 씨는 2012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한국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컨셉코리아’ 프로젝트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할 디자이너 5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 것이다. 손정완 이상봉 등 정상급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지난해 9월 열린 데뷔 무대에 이어 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링컨센터 ‘더 스테이지’에서 두 번째 패션쇼를 갖는다.
백화점 편집숍을 통해서도 상업성을 인정받았다. 롯데백화점이 부산본점에 오픈한 신진디자이너 편집숍 ‘유니크샵’에서 크레스에딤은 매출이 가장 좋다.
뉴욕에서 안정적으로 데뷔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배달 사고로 서울에서 부친 샘플이 도착하지 못했고, 외국 모델들의 발 사이즈를 가늠하지 못해 부랴부랴 새 신발을 공수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었다. 김 씨는 “그때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 쇼는 좀 더 완벽하게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 캠퍼스의 유령
뉴욕 무대에 서기까지 김 씨는 수없이 도전하고 낙방하며 꿈을 키웠다. 전문대에서 메이크업과 헤어를 전공한 김 씨는 뒤늦게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뒤 세종대 패션디자인과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졸업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모든 패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어요. 첫 도전부터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10개의 공모전에 출전해 9개 대회에서 상을 탔어요.”
공모전에 도전하기 위해 하루 종일 캠퍼스에서 먹고 자고 일하다 보니 별명도 생겼다. 캠퍼스 내 건물 이름을 본떠 붙여진 ‘군자관의 유령’이었다.
졸업 후 이름을 건 브랜드를 갖고 싶었지만 당장 생계가 걱정이었다. 친구와 함께 맨손으로 인터넷 쇼핑몰을 차렸다. 주문하는 수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물건을 떼기 위해 동대문 도매 시장을 찾아도 누구 하나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넉살로 상인들과 친분관계를 넓혔다. “잘 팔리는 물건을 빨리 확보하려면 직원들이랑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야유회까지 따라갔어요.”
2년쯤 고군분투했지만 경제적 문제로 사업을 접었다. 이후 친구와 함께 서울 홍익대 앞에 작은 의류 매장도 열었지만 군 입대 때문에 이마저도 오래 운영하지 못했다. 제대하니 나이가 어느덧 서른이었다. 패션업체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기엔 늦은 나이였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무일푼으로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결국 공모전이었어요. 2007년 두산타워 디자인 콘퍼런스에서 은상을 받으면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동대문 두산타워에 매장을 열 수 있게 됐죠.” ‘크레스에딤’이라는 브랜드는 이때 출범했다.
그의 도전은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재수 끝에 차세대 디자이너를 선정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쇼’ 대상자로 선정돼 국내 패션쇼 무대에도 데뷔했다. 이제 유학파이거나 ‘백’이 없으면 패션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로 기회를 찾아 나서야죠. 결국 내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도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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