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석유공사 목진호 과장(56)은 설을 닷새 앞둔 5일 가족과 작별하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목 과장은 1987년부터 국내 유일 원유 시추선 두성호의 선장으로 일해왔다. 명절마다 자손의 절도 못 받아보는 조상님께는 죄송하지만 꿈같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두성호가 원유를 끌어올리고 있는 미얀마 인근 바다로 나가야 한다.
전 세계 바다에서 원유와 가스를 끌어올리는 해양플랜트 설비를 ‘싹쓸이’하는 조선강국 한국이 소유한 시추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척이다. 1984년 대우조선해양이 국내 기술로 건조해 한국석유공사에 인도한 두성호가 주인공이다.
두성호는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고 석유 자원개발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시추선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탄생했다. 하지만 칭찬보다는 구박을 더 많이 받았다. 1986년 국제 유가가 다시 폭락하면서 각국에서 유전개발 프로젝트를 줄였고 두성호의 일감도 줄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만들고 당시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명명(命名)한 배라 이후 정부에서 일부러 배를 놀리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도 샀다.
1990년대 후반 까다롭기로 유명한 오일메이저 셸의 안전기준을 통과해 말레이시아에서 원유를 시추한 이후 두성호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2008년 환경보호 기준이 까다로운 러시아 캄차카 작업 이후 러시아는 두성호의 단골 고객이 됐다. 두성호는 이 무렵부터 원유를 예상치보다 많이 끌어올려 ‘럭키 리그(rig·해저 유전굴착 장치)’라는 별명도 얻었다.
올해로 서른 살을 맞은 두성호는 이미 일반 시추선으로 보면 선령(船齡)이 다한 노장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보수를 받아 앞으로 15년 정도 더 바다를 누빌 수 있는 젊은 선박으로 다시 태어났다. 두성호는 그동안 미국, 러시아 등 세계를 다니며 30년 동안 180여 차례 시추공을 뚫었다.
최첨단 시추선은 수심 3000m 이상의 바다에서 8000∼1만 m 아래까지 파내려갈 수 있도록 발전했지만 두성호의 작업 가능 수심은 최대 450m, 해저 7600m에 불과하다. 그러나 130여 척의 첨단 시추선을 보유한 미국 ‘트랜스오션’이나 수십 척을 보유한 ‘다이아몬드 오프쇼어’ 등 글로벌 선사들과 당당히 경쟁해 이미 2년 치 일감을 쌓아놓고 있다.
두성호의 경쟁력은 ‘연륜’이다. 두성호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석유공사 리그사업처 박정철 과장은 “다른 시추선보다 낮은 사고율과 배와 한몸이 된 운용인력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원유 시추사업이 심해로 더 멀리 나가는 추세에 맞춰 석유공사에서 2008년 제2 두성호를 추진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시추선 건조 붐이 일어 수익성이 불투명하고 외국 투자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제2 두성호는 아직까지 태어나지 못했다.
두성호를 움직이는 인원은 총 100명 내외. 현지 채용된 외국인 근로자 등을 제외한 10명의 석유공사 직원이 두성호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이들은 망망대해에서 2교대로 ‘4주 근무, 4주 휴가’의 근무 패턴을 반복하며 풍랑과 싸우고 있다. 두성호 사람들은 집안의 경조사를 못 챙기는 것을 가장 견디기 힘든 점으로 꼽는다.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다에서 헬기로, 다시 비행기로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사흘이 걸리는 바람에 상주(喪主)인 직원이 장례가 다 끝나고 도착해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목 과장은 두성호와 함께 누빈 수많은 바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우리나라 동해를 주저 없이 꼽았다. 주로 남의 바다에서 작업을 하지만 국내 대륙붕에서도 끈질기게 시추작업을 해 지금은 동해 가스전에서 상업용 가스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플랜트 시장의 호황으로 ‘오일 머니’에 대한 꿈을 안고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목 과장은 “두성호가 하나밖에 없는 국가 재산으로 에너지 전쟁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책임감을 갖고 원유 탐사 사업에 관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