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도 안 부르고 내가 다 청소해. 술, 담배에 헛돈 안 쓰고 연금 타 쓰면서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하모 씨(76)의 아파트. 7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거실 테이블엔 리모컨이 각에 맞게 정돈되어 있고, 싱크대에도 설거지가 안 된 접시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사별한 하 씨의 일과가 집 청소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식사하고, 골프연습장을 찾아 운동하고, 수영도 즐긴다. 저금도 하고 손자들 용돈도 쥐여준다.
이런 생활이 가능한 건 주택연금 덕분. 한국주택금융공사에 집을 담보로 맡기고 한 달에 221만 원을 받는다. 하 씨가 은퇴 후 바로 주택연금에 가입했던 건 아니다. 69세에 은퇴했을 땐 우리나라 또래 노인들처럼 집은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축은행의 높은 이자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1년여 전 저축은행 연쇄 퇴출로 1억 원가량 손해를 보자 생활이 곤란했다. “친한 공인중개사에게 물었더니 예전처럼 부동산 대세상승기는 안 올 거라면서 주택연금에 가입하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 가입자가 급증하고 있다. 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1월 한 달 동안 새롭게 가입한 사람이 653명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가입자가 200%, 전월 대비로는 77% 늘었다. 2007년 7월 첫선을 보인 뒤 지금까지 총 1만2952명이 가입했다. ○ “현금을 쥐고 있어야 당당해져”
주택에 대해 ‘소유욕’이 강한 한국인에게 주택연금이 파고든 건 부동산 경기에 대한 절망이 한몫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서울 전체 아파트 가격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중위 아파트’ 가격은 2009년 9월 5억1458만 원에서 2012년 9월에는 4억8257만 원으로 3년 만에 6.2%(3201만 원) 하락했다.
이런 추세가 ‘나중에라도 가격이 혹시 오르면 어떡하나’라고 고민했던 노인들이 주택연금에 가입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다. 떨어지는 집값에 노심초사할 바엔 차라리 현재 가격에 집을 담보로 잡히고 현금을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 하 씨 집도 가입 당시엔 4억6000만 원 선이었지만 현재는 4억1000만 원. “일부는 아직도 집값이 뜨지 않겠느냐며 기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대를 접었고, 그러자 주택연금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다”는 게 하 씨의 말이다.
‘자녀들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김모 씨(72)는 자녀가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용돈을 받는 생활을 원치 않았다. 키우고, 결혼할 때 집도 장만해준 만큼 이제 더이상 도와줄 이유도, 기댈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 “재산보다 ‘현금’을 쥐고 있는 게 훨씬 나아요. 손자들에게 옷도 사주고, 용돈도 줘야 요즘은 할아버지 노릇도 할 수 있어요. 이젠 손자들이 날 ‘능력 있는 할아버지’로 생각한다니까요.”
자녀들의 생각도 변하고 있다.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에 거주하는 이모 씨(79)는 2007년부터 일찌감치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이 씨는 “은퇴한 지 10년이 넘어가니까 은행 예금도 떨어져가고 뇌출혈인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면서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 자녀들과 상의했다”며 “아이들이 흔쾌히 찬성했고 지금도 ‘잘 가입했다’고 말한다”라고 말했다.
○ 급속도로 바람 타는 주택연금
현재 주택연금은 부부가 모두 만 60세 이상이고 집값이 9억 원 이하여야 가입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주택연금 가입 연령을 좀 더 낮추자는 공약을 내놨기 때문에 앞으로 ‘부부 모두 60세 이상’이라는 규정은 일부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주택연금 가입자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수 있다는 뜻.
허윤경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국민연금을 받는 시기는 65세여서 은퇴 시기인 60세에서 65세 사이에 5년 정도의 공백기가 생긴다”라며 “별도의 노후대비 없이 집밖에 없는 사람들로서는 역모기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앞으로도 주택연금 가입자의 증가 추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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