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열여덟 살인 유채린 이단비 박수진 양은 고3 학생이면서 증권사의 어엿한 정규직원이다. 지난해 여름방학이 끝난 직후 한화투자증권의 사원이 됐다. 회사 측은 “특성화고 인력의 자질이 갈수록 우수해지고 있다”며 졸업반도 아닌 2학년생 40명을 미리 채용했다. 아이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했고, 투자상담사 같은 자격증도 따뒀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려는 회사와 준비된 아이들의 만남. 이들의 이야기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수 있을까. 》
이번이 첫 사례라 아직은 단언할 수 없지만 비슷한 사례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화그룹 684명을 비롯해 중소기업까지 총 700여 명의 특성화고 2학년생들이 처음으로 졸업하기도 전에 기업에 채용됐다. 다른 기업들도 올해는 2학년생 잡기 경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 열일곱 살에 취업에 성공하다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화증권 빌딩에서 세 학생을 만났다. “고3이 되지만 대학 갈 걱정도, 취업할 걱정도 없이 기쁘게 등교할 수 있잖아요. 얼른 학교에 가고 싶어요.”
기다리던 연락은 지난해 9월 7일 오후 7시에 왔다. 유 양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털썩 누웠다. 휴대전화를 열었다. 문자는 아직 없다.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이리저리 뒹굴기만 두 시간째. 전화기에 이상이 있나 싶어 전원을 몇 번이고 껐다 켰다. 문자 수신을 알리는 진동음이 울렸다. 벌떡 일어나 문자수신함 버튼을 누르자 ‘한화투자증권. 2012년 채용전제형 고교인턴 2차 면접 합격을 축하드립니다’가 떴다.
유 양은 문자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합격 문자가 확실했다. 쓰러지듯 소파에 다시 누웠다. 하늘을 향해 두 발을 치켜든 채 동동 굴렀다.
“그날 집에 혼자 있었거든요. 엄마한테 전화해 목소리 탁 깔고 ‘나, 떨어졌어’라고 했어요. 위로해 주시더라고요. ‘뻥이야. 붙었어’라고 정정한 뒤 엄마랑 꺅꺅 소리를 질렀죠.”
박 양도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하굣길에 합격 문자를 받고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평소에 잘 못 뛰는데 그날은 힘이 하나도 안 들더라고요.” 걸어서 족히 20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채용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40명을 뽑는데 지원자만 643명, 인턴의 기회는 76명에게 왔다. 인턴십을 마친 뒤에는 추가면접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한화증권은 성적보다 태도와 자신감 등 인성이 합격 여부를 갈랐다고 설명했다. 이동준 한화증권 인사팀 매니저는 “처음에는 회사에서도 반신반의해 고3과 고2를 함께 뽑았는데 고2의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걸 확인해 올해는 고2만 따로 뽑을 계획이다”며 “우수한 인재를 다른 회사보다 2년 먼저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고2 인턴십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 뚜렷한 목표의식에 노력은 저절로
4일 인천 부평구 상정로 인천세무고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 겸 개학식 현장. 전교생 970명 앞에 이단비 양이 섰다. 신입생 환영사를 맡은 것이다. 학교에서 단 두 명인 재학생 취업자 자격이었다.
세 학생 모두 입학할 때부터 취업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당한 설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도 취업을 서두르게 했다.
유 양은 “옛날에는 큰 집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 집 크기가 갑자기 작아졌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니 자신감도 많이 사라지더라고요. 얼른 돈을 벌면 떳떳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 “평소에 선생님과 신뢰 쌓아놓으세요. 뭐든지 적극적으로 손들고 나서세요. 아, 공부는 기본이죠!”▼
목표가 뚜렷하니 노력도 뒤따랐다. 고교에 진학한 뒤부터 이들은 틈날 때마다 각종 자격증시험을 준비했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딴 자격증만 전산회계, 컴퓨터 등 서너 개. 모두 학업성적도 우수해 전교에서 1, 2등을 다툰다.
이 양은 입학할 때부터 증권사 입사를 꿈꾸며 증권투자상담사 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3학년 언니들이 주축이 된 교내
금융투자 동아리에 들어가 틈틈이 공부를 해뒀다. “저는 자부심을 갖고 특성화고에 다니고 있는데 친척들은 왜 ‘상고’에 갔냐며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왜’에 대한 답을 빨리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죠.” 증권투자상담사는 지난해 11월 4전 5기 만에
합격했다. 올 1월에는 펀드투자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 “고3은 덤, 더 준비할래요”
세 학생은 바늘구멍을 뚫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고2를 대표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다. 진로가 결정됐다고 느슨해지지 않고 올 한 해 자기계발에 열중해 “괜히 미리 뽑았다”는 말이 안 나오도록 하겠다는 각오다.
가장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건 외국어. 자격증과 금융투자 관련 지식은 자신 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이나 대학생에 비해 외국어를 공부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유 양은 중국어 공부에 한창이다. 청소년중국어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중국어 교재를 달고 산다. “다들 영어는 잘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중국어로 승부를 보려고 해요.”
박 양은 신문 읽기를 택했다. “경제를 알려면 우리나라와 외국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매일 신문을 정독하고 궁금한 내용은 책도 사서 봐요.”
인터뷰가 끝날 때쯤 이들은 특성화고 후배들에게 취업에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여고생들의 입에서 놀랄 만큼 ‘실용적’인 팁이 쏟아졌다.
“가장 중요한 건 평소에 선생님과 신뢰를 쌓아놓으라는 거예요.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입사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려면
학교에서 뭐든 직책을 맡아두는 게 좋아요. 작은 일이라도 뭐든지 손들고 적극적으로 나서세요. 아, 공부는 기본인 거 다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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