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회사에 다니면서 연봉도 많이 받았으니 나머지 인생은 좀 더 보람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반도체 계측장비 제작회사인 오로스테크놀로지의 최종립 사장(54)은 2009년 회사를 세운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6일 경기 화성시 석우동 이 회사 본사 회의실에서 창립 당시를 돌아보는 최 사장과 이형일 이준우 상무의 표정에는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 해외기업이 반도체 장비 독점
지식경제부는 아직 연간 매출이 100억 원에 그치는 이 회사를 지난해 ‘차세대 일류상품 생산기업’으로 선정했다. 그 배경과, 최 사장 등이 자아내는 비장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계측장비의 특성과 국내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어찌 보면 한국은 제조만 잘하는 ‘반도체 강국’이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국이지만 정작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장비들은 대부분 외국 제품이다. 특히 반도체 회로가 극도로 미세해지면서 원자 단위의 정밀성이 필요하게 된 반도체 계측장비 분야는 더욱 그렇다.
장비 부품 하나하나까지 세계 정상급의 초정밀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극도로 높다. 얇은 회로가 담긴 수십 개 층의 산화막이 비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쌓였는지 검증하는 ‘오버레이’ 분야 계측장비는 KLA텐코라는 미국 회사가 세계 시장의 99%를 장악할 정도였다. 독점이다 보니 당연히 콧대도 높고, 물건값도 비싸게 받는다.
최 사장은 바로 그 KLA텐코의 한국지사장이었다. 그는 이후 또 다른 반도체 계측장비 기업인 미국 나노메트릭스의 한국지사장을 거쳐 미국 본사 부사장도 지냈다. 미국 회사에 있는 동안에도 가능하면 한국 지사를 키우고 싶어 생산·개발 부문을 국내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최대 고객회사인 삼성전자나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옆에서 장비를 개발하는 게 효율적일 것이라는 점 외에 한국의 연관 산업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작업해 성과가 나기 시작할 즈음 새로 취임한 미국 본사의 대표가 “생산과 개발은 다 본사에서 한다”고 방침을 바꿨다. 최 사장은 이때부터 ‘내가 직접 회사를 차려 반도체 계측장비 국산화를 이뤄내겠다’는 욕망을 키웠다.
○ “우리가 반도체 국가대표다”
10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회사를 차렸을 때 주변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반도체 계측장비 국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자금을 투자해 오는 기업도 있었지만 ‘저러다 말겠지’라며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식으로 창립하기 전 개최한 직원 워크숍에서 밤을 새워 회사의 비전과 모토를 만들었다. “우리의 경쟁사는 국내에 없다, 세계적으로도 한두 기업밖에 못 하는 일이니 우리가 대한민국 대표다”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이준우 상무는 “그때가 영화 ‘국가대표’가 나왔을 때여서 회사 홍보자료에도 그 영화 포스터를 패러디한 사진을 넣었다”며 웃었다.
한국 반도체기업이라고 해서 그저 한국 협력업체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계측장비는 반도체의 ‘심장’에 해당하는 공정의 핵심 장비다. 애국심이 통하지 않는 분야다. “다들 ‘국산화 좋죠, 해야 할 일이죠’라고 말하지만 ‘당신 라인에 우리 제품 넣자’고 하면 주저하는 게 현실”이라고 이형일 상무는 말했다. 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추구했다”고 덧붙였다.
부품 납품업체가 원하는 수준을 따라오지 못해 좌절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들은 기어이 해냈다. 2011년 6월 삼성전자에 처음으로 오버레이 계측장비 ‘OL-300n’을 납품했을 때 사옥에서 파티를 열었다. 떡을 돌리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두 달 뒤에는 하이닉스에 장비를 공급했다.
최 사장은 “오버레이 장비 부문은 이제 급속도로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3년 안에 이 부문에서 메이저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웨이퍼 인스펙션, 막 두께 측정 등 다른 반도체 계측장비 부문에서도 연내 새 제품을 내고, 세계 시장 규모가 5조 원에 이르는 반도체 계측장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름을 날리는 게 오로스테크놀로지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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