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금융 중심지 시티에는 ‘트레이더’라는 선술집이 있다. 말 그대로 주식, 채권을 매일 거래하는 트레이더들의 사랑방이다. 이곳에 한잔하러 가면 삼삼오오 모여 시끌벅적하게 하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언뜻 들으면 동물원 직원들 대화 같기도 하다.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가 지난해 유로존의 골칫거리였는데 유로존 병에 면역을 갖춘 국가인 줄 알았던 FISH(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마저 성장엔진이 멈춘 것 아닌가 하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 것이다.
새해 들어 첫 한 달간은 이 선술집 대화 주제에서 돼지, 물고기 얘기는 더이상 없었다. 각종 비관 시나리오가 판을 치던 지난해 여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유럽 주식시장이 전 고점을 뚫고 남유럽 국가들의 차입금리가 매일 급격히 떨어지는 마당에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일부 차분한 경제 분석가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거론되는 유로 시장 낙관론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제 새해도 석 달째로 접어들었다. 잠시 금융상품 가격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럽의 유명 경제신문, 방송들은 이 질문을 매일 쏟아내고 또 제각기 그럴듯한 논거를 제시하며 답을 하기 바쁘다. 1월 말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이 문제풀이가 가장 큰 화두였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새해의 시작은 유로존이 암울한 금융터널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시장 지표가 지배했다. 불과 반년 전 남유럽 국가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럽 주식시장 역시 새해 첫 달을 황소같이 힘차게 출발했다.
유로 경제를 진단한 일부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제 최악의 사태는 벗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이런 낙관론이 대세는 아닌 것 같다. 유로존에 초점을 두고 본 글로벌 경제 기상도 역시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로이터, 블룸버그통신도 매일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 미국과 유로존의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시장 전망치보다 낮게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유로존 총 생산이 0.2%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유로화는 작년 여름 대비 1월 말 최고 13%에서 2월 말 현재 9%대의 평가절상을 기록 중이다.
유럽중앙은행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강세 기조 유로화는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저인플레 유발로 결국은 가장 중요한 성장과 가격 안정에 방해꾼이 되었다”고 우려했다. 유로존의 수출 리더 국가인 독일은 엔 약세와 유로 강세로 수출 둔화를 특히 더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경험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혹 유로존도 V자 커브를 그리며 가파른 회복을 할지도 모른다고 점쳐보기도 한다. 이런 판단에 동참한 모 헤지펀드는 그리스 회사채를 작년 10월부터 매집해 현재 40% 수익률을 기록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채권전문 펀드는 작년에 아일랜드 채권에만 84억 유로를 투자하여 큰 수익을 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우리나라 투자가들은 성급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유럽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민족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올해 초 중동의 국부펀드에서 아시아 투자를 담당하는 선임 조사역과 색다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국은 혈통과 역사를 공유하는 ‘동질성’으로 뭉친 국가로 위기대처 능력이 그 어느 나라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 전체가 겪는 경제적 고통을 잘 견디는 저항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비해 유럽 혹은 유럽연맹은 국가 수만큼이나 다른 ‘이질성’으로 동일 사안에 대한 접근 방식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수많은 회의를 거쳐 긴축재정, 복지감소를 결정하면 유로존 유권자들은 거리 시위로 맞서고, 이런 뉴스에 금융시장이 출렁거리는 곳이 바로 유로존이다.
유럽 금융위기는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용감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술 개발을 위해 1초를 다투고 1%의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남유럽은 3, 4년 뒤처져 출발해야 한다. 혹 숙취에서 깨어나고 있다 해도 후발주자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리더가 되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할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