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물었다. 아들인 주류회사 ‘무학’의 최재호 회장(53)이 18일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직을 관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아버지는 무학의 창업주 최위승 명예회장(80)이다.
최 회장은 16.9도 저도(低度) 소주 ‘좋은데이’를 내놓으며 지난해 하이트진로(48.3%) 롯데주류(14.8%)에 이어 시장점유율을 3위(13.3%)로 끌어올렸다. 소주 업체로는 유일하게 매출액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12.9%) 증가하는 성적도 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들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난다니 뜻밖이었던 것이다.
19일 오후 경남 창원시 무학 본사에서 만난 최 회장은 “앞으론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965년 이후 2대째 ‘오너 경영’을 해온 무학으로선 새로운 도전이다. 주류 사업은 강민철 무학 사장이, 주류 이외 사업은 이수능 전무가 각각 대표이사를 맡고, 최 회장은 신사업과 해외 진출 등 ‘큰 그림’을 전담한다. 소주업체에 머물지 않고 무학을 한 차원 더 키우겠다는 뜻이다.
무학은 25도 소주가 대세였던 1995년 23도 소주 ‘화이트’를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2006년 ‘좋은데이’ 등 순한 소주를 내놓으며 인기를 얻었다. 그 덕분에 경남 지역 90%, 부산 지역 70% 점유율은 물론이고 ‘전국구’ 소주업체들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최 회장의 ‘큰 그림’ 중 하나인 수도권 진출은 2년 뒤에 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2015년을 목표로 수도권 영업망을 구축할 계획이지만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창원에 다음 달 완공을 목표로 ‘제2공장’을 짓고 있다. 최 회장은 “맥주부터 음료, 생수 등 다양한 사업 분야를 검토하고 있으며 해외 업체와의 업무 제휴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방 소주업체가 다 잘되는 것은 아니다. 대구·경북의 금복주(7.6%)나 광주·전남의 보해(5.5%) 등 대부분 업체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다. 충북소주는 롯데주류에, 전북 ‘보배’는 하이트진로에 각각 인수됐다.
무학은 지금도 ‘아날로그 마케팅’을 고수한다. 최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술집에 가서 소주 마시는 손님들의 불만을 듣는다. 1995년 ‘화이트’를 출시했을 때 시작한 술집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행사는 지금도 하고 있다. 최 회장은 “KTX로 2∼3시간이면 전국 어디나 갈 수 있는 시대에 애향심에만 호소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이 늘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건설회사 빚보증 문제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세운 기업을 자식이 말아먹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화이트’ 소주 판매에 전력투구했다. 직원들이 노사문제와 관련해 모든 사항을 회사에 일임한다는 백지 위임장을 쓸 정도로 기업을 살리는 데 똘똘 뭉쳐 4년 만에 빚을 갚고 일어섰다.
최 회장은 최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강조한 ‘인재 경영’에 꽂혔다. 직원 진급 때 자유 주제로 논문을 쓰게 하고 술 관련 지식 테스트, 심지어 마라톤까지 다양한 시험을 보게 한다. 최 회장은 “능력 없는 직원이 많아지면 기업은 순식간에 무너진다”고 말했다.
소주 두 잔이 치사량이던 그도 이제는 소주 두세 병을 마신다. 그동안 회사는 수도권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최 회장은 “술로 많은 사람 골병들게 해 나중에 지옥에 갈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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