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유모 씨(37)는 같은 해 대기업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대졸 신입사원에 비해 연봉이 낮았지만 견실한 기업에서 남들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컸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뒤 상황은 급변했다. 시퍼런 구조조정의 칼날은 피했지만 연봉은 크게 줄었다. 》
이후 급여에 대한 불만 등으로 2001년 퇴사해 새 일자리를 찾았지만 유 씨를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고졸’ 꼬리표 때문에 수없이 퇴짜를 맞았고 결국 찾은 자리는 계약직이었다. 지금도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유 씨는 “10년 넘게 하는 일이나 연봉은 나아진 게 없고 신분만 언제 회사를 그만둘지 모르는 비정규직이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2003년 카드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위기를 거치며 유 씨 같은 고졸 취업자들은 대졸자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무조건과 처우 등이 훨씬 나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공공기관과 금융회사 등을 중심으로 고졸 채용이 확대되고 있지만 고용 조건 등 차별적 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 10년 뒤 같은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4일 내놓은 ‘저학력 청년층의 고용 상태와 노동시장 성과’ 보고서는 1999년 당시 청년층의 고용 상태가 시간의 흐름, 경제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 20대 중반의 청년층(24∼27세) 중 고졸자의 상용직 비중은 74.2%였지만 이들이 36∼39세가 된 2011년에는 그 비율이 45.1%로 12년 만에 29.1%포인트나 급감했다. 반면 임시일용직(4.5%), 미취업(9.8%)의 비율은 12년 만에 각각 16.2%, 15.2%로 늘었다. 상용직 근로자란 1년 이상 고용계약을 맺고 취업한 사람을 뜻한다.
최종 학력에 따른 고용 조건 변화는 컸다.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자(24∼27세 기준)는 1999년에 69.8%가 상용직이었고 2011년에는 76.1%로 비율이 늘었다. 1999년 당시 20.6%였던 미취업자의 비율은 12년 뒤 5.5%로 줄었고, 1999년에 없던 임시일용직은 고작 7.8%포인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정호 노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2000년대 들어 몇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고용 환경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고졸자 등 취약 계층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말부터 대학 진학률 급등으로 청년층의 ‘학력과잉’이 심화된 점도 고졸자들의 설 자리를 좁혔다. 당시 은행, 대기업들이 ‘열린 채용’을 내세우며 학력을 구분하지 않고 직원을 뽑자 고졸자들이 대졸자에게 밀려 입지가 줄어든 것이다.
학력에 따라 일자리의 질이 갈리면서 학력에 따른 소득 양극화도 심해졌다. 상고를 졸업한 박모 씨(40)의 경우 1990년대 초 지방의 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2000년에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었고 지인들과 함께 사업에 손을 댔다가 2년 만에 모아둔 돈을 모두 잃었다. 고졸 학력에 자격증도 없는 박 씨를 원하는 곳이 없어 이후 택배기사,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 2007년 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됐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1999년 당시 24∼27세의 경우 고졸자의 평균 월 소득은 94만4000원으로 전문대졸 이상(92만7000원)보다 많았다. 12년 뒤인 2011년에는 전문대졸 이상의 월 소득이 337만5000원으로 고졸자(235만9000원)보다 43.1%나 높았다. 높은 학력에 더 많은 보상을 하는 연봉 체계로 인해 소득이 역전되고 격차가 벌어졌다는 게 노동연구원의 분석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교수(경제학)는 “정부와 기업들은 당장 고졸 취업을 확대하고 장려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들이 10년 뒤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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