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8년 봄 경기 파주시에 2억5000만 원짜리 전용면적 84m² 아파트를 장만할 때까지만 해도 김모 씨(51)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성공한 투자자였다. 자신이 모은 돈 6000만 원에 은행과 캐피털업체에서 1억9000만 원을 대출받아 장만했지만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이자를 내고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급 300만 원을 주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씨에게 매달 160만 원의 이자는 어마어마한 부담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당에 일을 나가던 아내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일을 그만뒀다. 중고교생인 두 자녀의 학원비조차 대기 힘들어진 김 씨 가족은 전형적인 내집빈곤층(하우스푸어)이 됐다. 대출이자를 갚기 위해 카드사와 저축은행에서 신용대출을 쓰다 보니 추가로 낸 빚이 8000만 원. 빚의 수렁이 깊어지자 2011년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1년이 넘도록 집을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신용불량 상태에 빠진 김 씨는 지난해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2.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별관의 경매법정. 부동산 경기침체를 반영하듯 방배동 주상복합아파트에서부터 논현동 아파트, 청담동 다세대주택까지 하루에 45개나 되는 물건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180석 규모의 경매법정이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빼곡히 찼다. 하지만 이날 주인을 찾은 물건은 단 3건뿐이었다. 그나마 낙찰된 물건도 앞서 2차례 유찰돼 가격이 급락한 중소형 아파트와 외제 자동차 등이었다. 이날 유찰된 42개의 물건은 최저매각가격이 10∼20% 깎인 채 다시 매물로 나올 예정이다. 해당 아파트나 주택 세입자들이 임대 보증금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서 하우스푸어만 아니라 세입자까지 공포에 떨고 있다. 집을 팔아도 대출이자를 다 갚지 못하는 하우스푸어 집주인들이 한계상황에 몰리면서 이들의 집이 대거 경매로 나오고 있다. 그러자 보증금도 못 찾고 거리로 내몰리는 세입자들도 늘고 있다. 경매업체인 부동산태인에 따르면 수도권 주택경매물건은 2008년 2만8417건이었지만 이후 매년 늘어나 지난해는 6만1328건이나 됐다.
문제는 부동산 가격 하락이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본보가 부동산 전문가 20명을 긴급 설문조사한 결과 80%가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집값이 계속 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위원은 “실물 경기침체가 여전한 데다 주택매매를 이끌던 베이비부머는 은퇴하고 실수요층이라 할 30대의 주택 구매력은 약화된 상태”라며 “일부에서는 떨어질 만큼 떨어졌다고 보는데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주택가격 10% 추가하락하면 ‘비명’
만일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주택가격이 더 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난해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일종의 위험대출인 ‘고원금 상환부담대출’이 35조 원이다. 이 대출은 담보가치인정비율(LTV)이 60%를 초과하는 대출 가운데 지금은 이자만 내고 있지만 만기가 되면 원금의 일부라도 갚아야 하는 대출이다. 2014년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이 28조 원, 이 중 상환해야 하는 원금은 2조 원이다. 만일 부동산 가격이 10% 추가 하락하면 갚아야 할 원금이 6조 원으로 3배가 된다.
이상엽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주택 대출한도가 집값을 기준으로 정해져 있는데 현재도 이자를 가까스로 내는 가구 중 집값이 더 떨어지면 감당 못할 가구가 늘어난다”며 “경매로 넘어가는 집이 급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집을 팔고 금융자산까지 털어 넣어도 은행 빚을 갚지 못하는 깡통주택도 쏟아질 수밖에 없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집값이 10% 추가 하락하면 깡통주택 가구는 현재 10만1000가구에서 11만7000가구로 16%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 ‘깡통 전세’ 공포
시장에서는 이미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대법원 경매정보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전국 법원에 접수된 경매신청건수는 1만1615건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 1만2059건 이래 월별로 최대치를 보였다.
세입자들의 ‘깡통전세’ 공포도 커지고 있다.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경매시장에 넘어온 주택의 최근 감정가 대비 낙찰가율이 70% 중반 수준이라 전세 세입자들이 보증금의 일부를 떼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경기 안양시에서 전용 87m² 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한모 씨(37)도 최근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바람에 전세금 9800만 원을 모두 날렸다. 2009년 계약 당시 집주인이 은행에서 3억 원을 대출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당시 집값이 4억 원을 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던 게 화근이었다. 지난해 집값은 3억 원 밑으로 추락했고 집주인이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자 은행은 아파트를 경매로 넘겼다. 결국 올 초 아파트는 2억4000만 원대에 낙찰이 됐고 한 씨는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부동산태인에 따르면 지난해 수도권에서 주택 경매 절차가 마무리된 1만3694건 가운데 세입자가 전세금이나 월세보증금을 전부 혹은 일부 떼인 사례가 42.4%인 5804건에 달했다.
정부가 이르면 이달 말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나섰지만 전문가들은 과거 부동산 시장 과열기에 도입한 규제들을 획기적으로 푸는 종합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큰 효과가 없을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하우스푸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의 대책이 나와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박상언 유앤알 컨설팅 대표는 “집값이 반등하거나 소득이 늘지 않는 한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며 “주택담보대출을 장기로 전환해 원리금 상환 부담을 낮춰주는 방법 등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심성 정책은 세금 부담을 늘리는 등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어 정책을 내놓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 고위험대출 ::
담보가치인정비율(LTV)이 규제 상한인 60%를 초과하는 대출 중 현재 이자만 내고 있어 만기 연장 시기가 도래하면 원금 중 일부라도 상환해야 하는 대출
:: 깡통주택 가구 ::
경상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비율이 60% 이상인 잠재적인 내집빈곤층(하우스푸어) 중 대출금이 상환 능력(집값 평가액 60%+금융자산)을 넘어선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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