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기보-주택금융공사-조폐공사… 뚜렷한 기준 없이 이사회서 전격 결정
다른 공기업까지 ‘도미노 인상’ 우려
#1월 25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주택금융공사 14층 중회의실 창문은 영하 11도의 혹한으로 서리가 가득했다. 이사회를 주재하던 서종대 사장은 잠깐 눈에 서리가 낀 듯했다. 공기업 이사회에서 좀체 보기 힘든 ‘비상임이사(사외이사) 기본연봉 인상안’ 때문이었다. 정부 지침에는 기관장, 감사 등 임원의 보수만 이사회에서 결정토록 돼 있을 뿐 사외이사 관련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통상 공기업 이사회에선 사외이사 보수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이날 이사회는 달랐다. 인재경영부장의 간단한 설명 직후 사외이사 연봉을 93만 원씩 올리는 안이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참석한 6명의 사외이사는 모두 침묵했다.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주택금융공사 조폐공사 등 금융 공기업 네 곳이 올해 1∼3월 이사회를 열어 사외이사 26명의 연봉인상률을 상임임원과 같은 수준인 3% 가까이로 책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정부 핵심 경제정책인 서민과 중소기업 지원을 주도하는 공기업들이 사외이사 연봉을 뚜렷한 기준 없이 상임임원과 같은 비율로 올린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와 공기업을 관리 감독하는 기획재정부는 ‘자율성 보장’이라는 명분을 들며 보수 인상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 사외이사 예우에 나선 금융공기업
기획재정부는 작년 말 전체 285개 공기업에 기관장 등 임원 연봉을 2.89%까지 높이라는 지침을 통보했다. 대부분의 공기업은 인상 대상을 상임임원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4개 금융공기업은 이 지침을 사외이사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특히 신보 기보 주택금융공사 소속 사외이사의 연봉은 똑같은 폭으로 올라 담합 의혹을 사고 있다. 세 곳 모두 사외이사 연봉을 2012년 3107만4000원에서 올해 3200만 원으로 높인 것이다. 이런 인상폭을 인상률로 환산하면 2.98%로 기재부 지침에 나와 있는 임원연봉 인상 상한선(2.89%)보다 높다. 사외이사에게 연봉을 줄 때 끝자리에 천원 단위의 ‘잔돈’이 붙어 불편했는데 이번에 끝자리를 만원 단위로 맞추려다 보니 인상률이 상한선보다 높아졌다는 것이다.
조폐공사는 사외이사 연봉인상률을 임원 연봉 상한선인 2.89%에 딱 맞춰 지난해 2616만6000원이던 연봉을 올해 2692만2000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어떤 경우나 공기업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연봉을 정부 보수지침에 명시된 인상률만큼 올리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런데도 금융공기업들이 무리하게 연봉을 높이는 것은 대부분 전현직 저명인사인 사외이사들을 예우하기 위해서다. 공기업 관계자는 “이만큼 올려도 여전히 적다는 불만이 나온다”며 “시중은행들은 사외이사 연봉을 훨씬 많이 올리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 “무리수를 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공기업 사외이사는 현직 교수, 변호사, 전직 관료 등이 부수입을 챙기는 수단으로 활용돼 온 측면이 있다. 본래의 직업을 유지하면서 3000만 원 안팎의 연봉과 회의 때마다 30만∼50만 원의 수당을 별도로 받는 관행이 일반인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번에 일부 공기업이 사외이사 연봉을 편법으로 높인 것을 계기로 국민감정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개 금융공기업이 사외이사 연봉을 올렸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자 공기업들은 “무리수를 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다. 대한주택보증은 사외이사가 상시 근로를 하지 않는 데다 수당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3월 이사회에서 연봉을 2400만 원으로 동결했다. 이 회사 강원석 노무복지팀장은 “사외이사 보수 인상에 대한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인상하면 외부의 질타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점을 감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일부 공기업은 금융공기업의 인상 행보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지금은 정부의 공기업 경영평가가 진행 중이라서 말하기 곤란하지만 몇몇 기관에서 사외이사에 대한 대우 수준을 높이는 방안을 은밀히 검토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 정책을 총괄하는 기재부는 공기업의 인건비 총액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김철주 기재부 공공정책국장은 “기관의 자율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점에서 사외이사 보수 같은 세부항목까지 들여다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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