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로 가는 길]<5>실리콘밸리의 상상력 깨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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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에 있는 에버노트 본사의 4층과 5층은 일명 ‘소통의 계단’으로 연결돼 있다. 4층에는 음료수만, 5층에는 스낵만 비치해 직원들이 오다가다 마주치게 했다. 레드우드=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미국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에 있는 에버노트 본사의 4층과 5층은 일명 ‘소통의 계단’으로 연결돼 있다. 4층에는 음료수만, 5층에는 스낵만 비치해 직원들이 오다가다 마주치게 했다. 레드우드=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에 있는 정보기술(IT)업체 에버노트를 방문했다. 에버노트는 문자, 사진, 음성, 손글씨 등으로 자신의 생각을 메모할 수 있는 같은 이름의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대박을 터뜨린 기업이다.

이 회사의 본사 4층 사무실 한쪽 벽에는 붉은색 커튼이 샤워커튼처럼 걸려 있었다. 직원 휴게실인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는 답변이 돌아왔다.

“괴짜(geek·한 분야에 빠진 사람을 일컫는 속어) 공간이에요. 밀폐된 곳이라야 업무효율이 오른다는 한 직원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겁니다.”

앤드루 신코프 에버노트 마케팅 부사장은 “직원 개개인이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해야 창조적인 생각이 나온다”고 말했다.

○ 창의성 스펙트럼 넓히는 공간

에버노트 본사의 모든 벽은 ‘아이디어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곳곳에 사인펜과 지우개를 비치해 언제 어디서나 낙서하듯 자유롭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끼적거리고 지울 수 있다.

아이디어 페인트로 칠한 벽은 본업과 관련 없는 작은 성과도 가져다줬다. 어느 날 한 직원은 사무실 벽에 자신의 취미인 그라피티(낙서 형태의 벽화)를 그렸고 회사는 직원의 숨은 재능을 알게 됐다. 에버노트는 최근 회사 버스의 디자인을 이 직원에게 맡겼다.

‘귀찮게 하는 모든 것을 없애준다’는 이 회사의 복지정책도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이 잔여일수를 생각할 필요 없이 휴가를 마음대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주일에 한 번은 직원의 집으로 가사도우미를 보내준다. 직원들을 최대한 편하게 해줘야 업무 효율성도 높아진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그 대신 모든 직원은 저마다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마감시한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철저한 성과주의다.

캘리포니아 주 팰러앨토에 있는 디자인컨설팅회사 아이디오(IDEO) 본사에도 특색 있는 공간이 있다. 나무 위에 덩그러니 의자 하나를 갖다놓은 것이다. 직원들은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든지 여기서 쉬거나 바로 옆에 있는 그네를 탄다. 고어텍스로 유명한 고성능 제품 생산업체인 고어는 모든 직원에게 일주일에 반나절씩 ‘장난 시간’을 허용해 창의적인 주제를 연구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게 한다. 직원의 다양성을 극대화하고 업무에 빠져들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낳는 든든한 토양이 된다. 동아일보와 전략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코리아가 함께 만든 ‘동아·베인 창조경제지수’ 결과를 봐도 창조경제의 첫 단계인 아이디어 창출을 활성화하려면 관용지수가 높아야 한다. 사회적 소수자,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개방적일수록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다양성·표현 지수에서 조사 대상 35개국 중 33위를 차지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군대식 문화가 학계, 공공기관, 기업에도 퍼져 있어 다양한 의견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용지수 역시 33위에 그쳤다. 외국인 근로자를 차별하는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문화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국 직장인 5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문화의 문제점으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체계(61.8%) △조직 우선주의(45.3%) 등이 꼽혔다.

○ 소통해야 창조적 아이디어 나온다

에버노트의 5층 부엌에는 직원들을 위한 과자와 빵 등이 차려진 스낵코너가 있었다. 하지만 음료수는 5층이 아니라 4층 부엌에 놓여 있다. 과자와 음료수를 다 먹으려면 4층과 5층을 오가야 한다. 이렇게 불편하게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린다 코즐로스키 마케팅 이사는 “그렇게 해야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자연스럽게 다른 동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오다가다 우연히 마주치게 해 소통 빈도를 높이려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그래서 에버노트는 4, 5층을 잇는 계단을 ‘소통의 계단’이라 부른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쿠퍼티노에 지을 새 사옥을 UFO 모양으로 설계하면서 직원들이 최대한 자주 우연히 마주칠 수 있도록 신경 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소통의 교차로’는 기업의 창조 경쟁력을 좌우한다. 공식적,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독일 자동차회사인 BMW는 조직 구성원 간 시각적 접촉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2005년 동료들의 친밀도를 높이고 쉽게 협업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설계한 프로젝트 하우스를 건설했다. 삼성전자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신사옥의 층과 층 사이 계단을 개방형으로 만들고 주변에 회의실을 둬 소통을 유도하려고 애썼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시대를 맞아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물리적 공간에서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아이디오도 직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무 공간을 재배치(redesign)해 창의성을 높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직원은 지정석이 없이 아무 데나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사무실을 구성할 수 있다. 또 팀플레이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면 사무실 어디든 가서 공간을 재구성한다.

김영배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창의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고 충돌하면서 생기는 것”이라며 “조직과 조직,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창조경제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드우드·팰러앨토=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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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소통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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