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앙드레 김(오른쪽)이 디자인한 삼성전자 ‘앙드레김 냉장고’. 삼성전자는 당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감성 디자인’을 내세웠다. 동아일보DB
삼성전자가 국내에 출시한 냉장고와 에어컨, 세탁기 등 백색가전 제품들은 한동안 반짝이는 원석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브랜드 로고로 화려하게 장식될 때가 있었다.
디자이너인 고 앙드레 김과 합작한 ‘앙드레김 냉장고·에어컨’(2006년), 한국도자기의 꽃무늬 디자인을 적용한 김치냉장고(2007년), 이탈리아 출신 보석 디자이너 마시모 주키가 보석함 느낌으로 디자인한 ‘마시모 주키 냉장고’(2010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화려한 장식과 디자이너 브랜드가 사라졌다.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9000 시리즈’를 내놓은 뒤 생긴 변화다. 요즘 나오는 신제품은 아무런 색도, 디자인도 입히지 않은 채 메탈 본연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이는 더이상 그 시대의 유행 색상이나 인기 브랜드에 의지하지 않고 삼성전자만의 디자인 로드맵을 펼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윤부근 소비자가전부문장(사장)이 지휘하는 일종의 ‘디자인 실험’이다.
삼성전자 윤부근 사장(왼쪽)이 2월 출시한 냉장고 ‘지펠 푸드쇼케이스 FS9000’을 소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프리미엄 가전인 ‘9000시리즈’를 선보이면서 사용자의 생활 편리성을 극대화하는 ‘가치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15년까지 ‘가치 디자인’ 시대
삼성전자는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디자인 바탕을 ‘가치 디자인’, 즉 소비자가 제품을 사용하면 할수록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으로 정했다.
9000 시리즈 디자인을 총괄한 부민혁 수석 디자이너는 “2000년대 초반까지는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을 추구했고, 이후에는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감성 디자인’을 시도했다”며 “지난해부터는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가치 있는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의 이 같은 디자인 실험의 배경에는 외관이 튀지 않아도 충분히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부심과 유명 디자이너와 합작하지 않고 삼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승부할 수 있다는 브랜드 자신감이 반영돼 있다.
냉동실을 냉장실 아래에 배치한 냉장고(T9000), 8인치 대형 액정표시장치(LCD)를 부착한 세탁기(W9000), 문을 열지 않고도 원하는 제품을 꺼낼 수 있도록 쇼케이스를 부착한 냉장고(FS9000) 등의 외관은 모두 심플한 직사각형이지만 사용자의 행동패턴을 철저히 분석한 끝에 나온 가치 디자인들이다.
○ 딸에게 권하는 가전제품
삼성은 평균 10년 이상 쓰는 백색가전의 특성도 디자인 실험에 반영했다. 부 수석은 “2011년 초부터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가전 디자인이 과연 옳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어느 나라에서나 백색가전은 10년 이상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점에서 ‘영속적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밀레나 지멘스 같은 유럽의 전통 있는 가전업체의 브랜드에는 자손에게 물려주는 ‘유산’의 개념이 녹아있듯 딸이나 며느리에게도 권할 수 있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디자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삼성전자가 디자인의 근본을 바꾸는 데는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많은 소비자들이 화려한 디자이너 브랜드에 만족하고 있는데 왜 굳이 변화를 시도하느냐는 내부 반론도 있었다. 실제 삼성은 가치 디자인을 추구하면서 적잖은 투자를 해야 했다. 제품의 주요 소재를 강화유리에서 메탈로 바꾸면서 소재 연구부터 시작했다. 생산 공정과 인력 교육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디자인은 제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소프트 파워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론에 따라 회사가 통 크게 지원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2011년 기준 삼성전자가 확보한 국내외 디자이너는 1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국과 런던, 밀라노, 델리, 상하이(上海), 도쿄(東京), 로스앤젤레스 등 6개 디자인연구소에 배치돼 주요 국가별, 민족별, 세대별 소비자 행동 패턴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냉장고 디자인을 연구할 때는 해당 국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의 종류와 냄새부터 식사의 단계, 테이블 매너, 밥 먹는 동안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까지 조사한다.
부 수석은 “아직 해외에서 삼성전자는 1세대 소비자를 확보하는 단계”라며 “제품을 가장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디자인을 통해 외국인들도 딸과 며느리에게 삼성전자 제품을 권유하는 시대가 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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