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건희 회장… 質경영 넘어 창조경영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0일 03시 00분


1993년 6월 7일 신경영 선언 그후 20년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심장부는 연구개발(R&D) 인력이 모여 있는 수원 디지털시티다. 28일 오후 찾은 경기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 수원 디지털시티에서는 연면적 30만 m² 규모의 25층짜리 초대형 연구개발센터 ‘R5’의 개관 준비가 한창이었다. R5는 다섯 번째 리서치센터라는 뜻이다.

세계를 제패한 스마트폰 연구인력 1만여 명이 일할 R5는 무선통신기술을 연구하는 ‘R3’, 디지털 미디어를 연구하는 ‘R4’에 이어 삼성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중심축이 된다. 연구동 곳곳에는 헬스장, 클리닉 등 고급 두뇌들의 창의력을 북돋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R4 등 기존 연구동과는 지하로 연결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R5 완공으로 디지털시티는 2만3000여 명의 R&D 인력이 근무하는 삼성전자 혁신의 중심축이 됐다”며 “제조 중심에서 R&D 중심의 혁신기업으로 완전히 변신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R5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신(新)경영’을 선언한 다음 달 7일 직후 정식 개관한다. 이곳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도 신경영을 상징하는 삼성 이노베이션 포럼(옛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이다.

○ 끊임없는 혁신 추진

국내 1위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수직 성장한 삼성그룹의 원동력은 이처럼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에 있었다. 시작은 1993년 6월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한 신경영 선언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 1위 그룹에 올라 한껏 들떠 있던 삼성에 일침을 날렸다. 1987년 취임 후 6년여 침묵 끝에 나온 열변이었다. “소비자한테 돈을 받고 팔면서 불량품 내놓는 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불량은 암(癌)이다. 이 질(質)이 안 되는 이 삼성그룹이…. (이제는) 질이다. 질.” 이 회장은 이후 1800여 명의 임직원과 350시간 대화를 나눴다. 사장단과 800여 시간 토론을 이어가며 신경영을 설파했다. 신경영을 책으로 묶어 냈고, 만화책까지 펴내 계열사와 협력사에도 돌렸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혁신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 회장은 그해 8월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뽑겠다는 ‘여성 인재론’을 폈다. 그해 말 사상 최대 규모 인사에서 첫 여성 임원이 탄생했다. 이듬해인 1994년 6월에는 신입사원 입사지원서에 출신학교를 적지 않도록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소비자문화원도 세웠다. 유명 디자이너인 이신우 씨에게 생산직 근로자의 작업복 디자인을 의뢰한 이 회장은 1996년에는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는 디자인”이라고 선언했다.

▼ “내외부 갈등 풀고 새 모멘텀 찾아야 할 시기” ▼

○ 초일류에 대한 집념


지난해 말 삼성 내부에선 큰 소동이 일었다. 유럽 금융위기의 추이를 전망하기 위해 영국은행(BOE) 총재를 만나라는 이 회장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총재를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영국은행 측에서 부총재가 나오겠다고 했지만 삼성은 정중히 사양했다. 삼성 관계자는 “어떤 분야든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를 만나고, 최고 제품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당시에도 실무자가 “켐핀스키 호텔의 숙박비가 너무 비싸 참석할 임직원들을 주변 호텔에 묵도록 하겠다”고 의견을 내자 격노했다고 한다. 최고를 경험해야 최고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 회장은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에 오른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려 한다”며 “199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전매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삼성 제품과 소니, 도시바 제품을 뜯어 부품까지 비교하고, 이 같은 일을 20년간 계속할 정도의 세계 일류에 대한 집착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가 TV 등에서 세계 1위 자리를 굳힌 2006년엔 초일류를 위한 새로운 과제를 제시했다. “남의 것만 카피해서는 독자성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라”며 창조경영을 제시한 것이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의 혁신 시계는 신경영 20년, 창조경영 7년을 가리키고 있다”며 “아직 모든 계열사가 달성하지 못한 현재 진행형의 과제”라고 말했다.

○ 내외부 갈등 풀고 생태계 만들어야

삼성이 풀어가야 할 과제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제조에서 R&D로 전환하면서 국내 고용인원 증가 폭이 작아지자 “고용을 줄이고 해외투자만 늘린다”는 비판에 부닥친 것이 대표적이다. 삼성이 시장을 독식한다는 견제도 늘어났다.

내부 갈등도 드러났다. 불량을 줄이기 위해 하나의 방향으로 집중한다는 제조업 방식의 기업문화에 익숙지 않은 일부 젊은 인재들이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신구 갈등’도 숙제가 됐다. 이 회장에 대한 의존도가 큰 경영구도도 고민거리다.

이장우 경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은 새로운 혁신의 모멘텀을 찾아야 할 시기”라며 “삼성 혼자가 아니라 삼성을 중심으로 한 창조 생태계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원=김용석 기자·김지현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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