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 오십시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3일 오후 8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택가의 한 건물 앞.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훤칠한 남자 종업원 4, 5명이 출입문을 열고 기자를 맞았다. 문이 열리자 ‘지하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공간은 복층 구조로 돼 있고 벽에는 200종류의 위스키가 진열돼 있었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야 ‘싱글 몰트 위스키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업이 시작되자마자 20, 30대 여성들과 40, 50대 남성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나타났다. 30분도 안 돼 전체 20여 석의 절반이 찼다. 》
1월 문을 연 이곳엔 간판이나 안내 문구가 없다. 가게 이름을 ‘볼트82’라고 소개한 마서우 사장(32)은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우리 가게의 포인트”라며 “간판을 달거나 가게를 알리는 홍보활동을 일절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업체들
소비자를 끌기 위해 수많은 마케팅 기법을 내놓고 브랜드 노출을 극대화하는 것이 유통업계와 외식업계의 일반적인 홍보 전략이다. 하지만 최근 일부에서 간판 없는 가게, 브랜드 이름을 지운 상품 등 노출을 최소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마케팅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는 게 낫다는 역발상에서 비롯됐다.
한남동의 또 다른 바 ‘스피크이지 몰타르’는 간판이 없는 것은 기본이고 출입구를 찾기도 어렵다. 문을 두드리면 종업원이 나와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며 일종의 ‘설정극’을 한다. 그만큼 비밀스러운 공간임을 강조한다. 출입문 바깥은 조용했지만 안에는 40여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이곳은 개장 초기만 해도 간판이 있었으나 6개월이 지난 뒤 없앴다. 스피크이지 몰타르 관계자는 “뜨내기손님이 많아지자 불편해 하는 단골들이 생겨났다”며 “간판을 없애 아는 사람만 오는 가게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간판 없는 가게들은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 홍익대 앞, 강남구 청담동 등 주로 젊은층이 즐겨 찾는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 이태원의 일본 가정식집 ‘메시야’도 간판이 없다. 총 좌석이 10석밖에 안 되는 작은 가게지만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김건희 메시야 사장은 “한 끼를 먹더라도 맛집을 찾아가는 시대”라며 “간판이 없거나 홍보 수단이 없어도 콘텐츠가 좋으면 사람들이 찾는다”고 말했다.
○ 브랜드를 노출하지 않는 기업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도 영업 전략이다. 자신을 감추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른바 ‘숨바꼭질 마케팅’이라는 평가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게 불친절하게 보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나게 하는 바이럴 마케팅, 궁금증을 유발하는 티저 마케팅, 선택 받은 사람만 대상으로 하는 VIP 마케팅 등 많은 전략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유통 대기업들도 이런 전략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SPC가 2007년 이태원에 낸 디저트 카페 ‘패션 5’는 6년째 간판이 없다. 소수 정예 손님만 받고 서비스 질을 높여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현대백화점은 최근 남성 잡화 편집매장 ‘로열 마일’을 열면서 브랜드 제품의 로고나 브랜드 이름을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이곳엔 벨트, 휴대전화 케이스, 문구 등 30개 브랜드 제품이 전시돼 있다. 이성환 현대백화점 상품본부 바이어는 “소비자들이 제품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매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미국 뉴욕 소호 지역의 작은 옷가게나 일본 도쿄의 유명 라멘 가게 가운데 간판이 없어도 오랫동안 명소로 꼽히는 곳이 많다.
정지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다 보니 기업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콘텐츠나 서비스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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